Cabinet of Curio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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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23

1. 고등학교 때 Tracy Chapman의 I’m yours, if you are mine 이라는 가사를 참 좋아했다. 치기 어린 마음에 ‘내가 네가 될 수 없고 네가 내가 될 수 없음에서 오는 그 괴리감’이 어딘지 모르게 멋져 보였달까. 그런데 사실 내가 그때 싸이월드 대문 글로 오랫동안 저 문구를 걸어놓고 허영심을 충족시켰던 것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이불 킥이 절로 나온다. 애매한 청춘의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지금의 나는 ‘내가 너였더라면…’로 시작하는 말들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내가 너네 집만큼만 살았어도, 너만큼만 어렸어도, 혹은 너 같이만 생겼어도 같은 말들. 아무리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절대 넘을 수 없는 ‘개인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나서부터, 나는 남의 아픔을 함부로 가늠하고 또 나의 고통을 아무렇게나 발설하는 일을 극도로 꺼리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2. 하여간 ‘나의 아픔’이라는 것은 그렇게나 이해받기 힘든 일이다. 한강 작가의 시집을 읽다가 문득 내 아픔들도 서랍 속에 처박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처박아버리고 남의 일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면 원근법 때문이라도 조금은 고통이 작아 보이지 않을까. 쉽게 변형되고 훼손되는 일상의 자잘한 기억들처럼 나의 아픈 기억들도 착각으로라도 포장되지는 않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단순히 “그건 아픈 기억이었어”라고 딱 잘라 말하고 끝내버릴 순 없는 걸까. 만약 각자의 아픔들이 그렇게 서랍 속에 넣어질 수만 있다면, 한강 작가가 써내려간 시어들처럼 단어의 형태로, 아니 꼭 문자가 아니더라도 어떤 형식으로든 아픔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삶을 가볍게 살아갈 수 있을탠데.

3. 그나마 이렇게 애매하게라도 글로 써놓으면, 버거운 일들도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리기 때문에 아주 조금은 가벼워졌구나 싶어서. 견딜 만 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하 그만 생각하고 자야지.

파란 돌, 한강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을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러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Dan Croll - From Nowhere

9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 무한도전은 더이상 기차와 달리기 시합을 하거나 목욕탕에서 기계 펌프와 물빼기 시합 같은 것들을 할 수 없는 거대 프로그램이 되었버렸다. 머리 살짝 벗겨지신 그 심판 아저씨의 우렁찬 휘슬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었던게 언제 였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드 레이서’ 프로젝트는 어쩌면 그들의 높아진 위상과 인기 만큼의 ‘무모한 도전’이었다. 모두가 안된다고 할 때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것. 번듯한 결과보다 땀흘려 노력한 과정들이 박수 받을 수 있는 것. 유치하고 재미없다는 비난 속에서도 이들을 응원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건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비록 예능 프로그램에 불과할지라도 그들의 진심이 여전히 옳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 어딘지 모르게 뭉클하다.

Wish I Was Here
by Cat Power and Coldplay
from Wish I Was Here (Soundtrack)

배우지 못한 것들

moycona:

뜨거운 여름 볕 아래 이제 막 다시 걸음을 배우는 노인을
어떤 눈빛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나는 배운 적이 없다.

아직 둥글어지지 않은 돌멩이를 만져주고 싶을 때,
그래도 괜찮은지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다.

모르는 사람이 울고 있을 때 어깨를 안아줘야 하는지,
모르는 척해야 하는지 들은 적이 없고

어제는 사랑했으나 오늘은 미워진 사람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좋을지 물은 적도 없다.

배우지 못한 것들이 아직 많은데
삶은 책장을 넘기듯 휙 지나간다.

책장을 넘기며 아이처럼 울음이 터질 때
울어도 좋은지,…

The 1975 - Sex (Acoustic ver.) at G in the Park

Summertime Clothes
by Animal Collective
from Merriweather Post Pavilion

한국식 킨포크, 140710

image

바야흐로 킨포크(Kinfolk) 열풍이다. 2011년에 창간 된 이 글로벌 감성 매거진은 작년 말 처음으로 한국어판이 출간되면서 이른바 ‘느린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킨포크 필진들이 말하는 느린 삶이란 명상을 하거나 필라테스 요가를 하거나 혹은 텃밭을 가꾸거나 하는 어떠한 클래식한 방식이 아니라 그저 각자의 일상에 충실하면서 디지털과 멀어져 아날로그적인 삶의 방식에 충실하는 모습을 지칭하고 있다. 갈수록 빨라지고 사소한 것들까지 스마트폰이나 디지털 기기에 의존해야 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삶의 방식’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인해 <킨포크 테이블>은 전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된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흐름들을 ‘스칸디나비아즘’ 혹은 ‘뉴 노르딕’이라고도 부르는데 오히려 킨포크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이제는 ‘킨포크’라는 것이 단순한 라이프스타일 잡지 이름이 아니라 이러한 현상을 지칭하는 하나의 표어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거창하고 있어보이는 설명과는 달리 잡지의 내용은 의외로 별거 없다. 브루클린이나 코펜하겐, 잉글랜드와 포틀랜드 같은 곳에 사는 각각의 사람들이 자신만의 소박한 레시피로 음식을 만들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 나눠 먹고 좋은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글과 사진으로 담아놓은 것. 혹은 직접 가구를 만들거나 몇년 전까지 비슷한 방식으로 유행하던 북유럽 인테리어 디자인 가구들과 덥스탭 음악들을 배경으로 깔아 놓고 푹신한 러그 위에서 직접 재배한 찻 잎을 따서 차 한잔 하며 책을 읽는… 뭐 대부분 이러한 느낌의 포스팅들이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이 친절하게 설명을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평소에 유행에 민감하고 바쁜 삶에 지친 사람들이라면 한번 쯤 킨포크를 읽으면서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딱 그정도 수준의 잡지랄까. 그리고 킨포크의 가장 큰 장점이자 특징도 바로 이러한 ‘별거아님’에 있다. 누구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쉽게 할 수 있을거 같은. 내 삶 인듯 내 삶 아닌 내 삶 같은 잡지. 당장이라도 집에 친구들 초대해서 대충 음식 만들어먹고 술도 좀 마시면서 기타도 띵가띵가 하고 이야기도 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면 그게 킨포크가 아닌가! 그래 세상 사는거 다 마찬가지지 북유럽 사람들이라고 다를바 없구만. 

하지만 킨포크 스타일의 삶을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따로 있다. 행복한 시간을 이쁘게 담아낼 질 좋은 카메라도 아니고, 식사 자리를 한 껏 들뜨게 해줄 값 비싼 음향 장치들도 아니며, 금전적인 부분이라던지 그것을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왜 행하는지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바로 느린 삶을 추구하는 데에 필수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여유 시간’의 유무에 달려있다. 그런 면에서 킨포크의 발향지인 북유럽 사람들의 라이프 사이클과 대한민국의 삶 사이의 가장 큰 환경적인 차이도 바로 이 ‘여유 시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세계에서 빠르고 시간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한민국에서 킨포크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당연한 일인 것이다. 우리는 레시피로 음식을 해먹을 시간은 커녕 끼니도 직장에서 야근하면서 교촌치킨으로 때우고, 집에 돌아가서도 음악을 틀어놓고 차 한잔하기는 커녕 피곤해서 세수하고 양치하는 것도 귀찮을 지경이니까. 킨포크 속에 등장하는 느린 삶의 모습은 정말 멋지고 근사해 보이는데, 이거야 말로 진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모습인 것만 같은데, 아 부럽다. 왜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는거지. 바로 이러한 가질 수 없는 욕망을 충족 시켜 주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컨텐츠가 될 수 있는 법이다. 사실 잡지사들이 이런식으로 ‘평범한 소비자들이 가질 수 없는 욕구’들을 무기로 무언가를 팔아 먹는 행태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도 너무 익숙하다. 비슷하게 따라 할 수는 있겠지만 어마무시한 가격에 똑같은 제품을 살 수 없는 패션 잡지 속의 옷들이 그렇고 그것을 걸치고 있는 모델들의 기다랗고 조각 같은 몸매들이 그렇지 않은가. 다만 킨포크 신드롬이 주목 받는 지점은 이러한 소비 욕구가 이제는 그저 여유 있게 사는 삶을 영위하는 것 그 자체로까지 번져나갔다는 점에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제 명품시계나 모델같은 몸매 처럼 평범하고 소소한 ‘느린 삶’ 역시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그런 욕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북유럽 사람들은 킨포크를 만들면서 전혀 이런 것을 의도한게 아니다. 그들에게 이 잡지는 욕망을 건드리는 그 무엇이라기 보다는 그냥 비슷한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잡지일 뿐이다. 국적의 다름과 처한 삶의 조건에서 오는 괴리감이 나에겐 약간 웃기기도 하고 조금은 씁쓸하기도 하다. 하긴 찾아보면 이런 것들이 한둘이겠나. 우리가 샐러드를 만들때 슬리퍼 신고 정원에 나가 바질을 따오는 것이 상상이 잘 안되는 것 처럼, 북유럽 애들도 한강에 앉아서 전화만 하면 자장면과 치킨이 배달된 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을터. 그렇게 보면 시간은 돈 주고 살 수 없다는 오래된 명제처럼 결국 가구나 가방과는 달리 라이프 스타일은 소비만으로 내 것으로 만들기는 힘든 것 같다. 삶은 단순한 이미지나 특정한 결과물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의 총합이니까. 킨포크던 뉴 노르딕이건 ‘그것을 갖고 싶다’가 아닌 ‘그렇게 살고 싶다’의 문제로 접어들게 되면 괴리가 생겨나고 머릿속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복잡해진다. Aㅏ~ 생각을 너무 많이해서 짜증도 나고 귀찮은데 오늘 점심에는 짬뽕이나 시켜먹어야지. 이것이야말로 한국식 킨포크가 아닌가! 문득 미국에서 짬뽕 배달이 안되서 1시간을 차타고 먹으러 간적이 있었는데… 그날의 빡침이 분명하게 생각났다. 허세 간지도 안나고 좀 덜 감성적이지만 어쩔거야 내가 한국에서 태어난 걸. 

@Kyungju, Korea

2014. 7
photo by inoran

Trying To Be Cool - Breakbot Remix

(via j4cob555)

#Ordinary June

2014. 6
photo by inoran

Enemy, 2014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분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분신술처럼 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분신들을 일하게 하고 나는 일 년 내내 놀고먹는 상상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분신의 존재를 내가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조금 복잡해지지 않을까. 생김새와 목소리 심지어는 몸의 흉터까지 똑같은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면 말이다. 게다가 그 사람이 내가 인생을 살면서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포기한 것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성취해 낸, 마치 내 마음속 한 켠에 고이고이 묻어둔 욕망과 이상적인 꿈을 똘똘 뭉쳐 만든 것만 같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런 사람을 어느 날 내가 직접 마주하게 된다고 가정하면, 과연 나는 그 충격을 스스로 통제하고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에너미는 이런 질문들을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고 관객의 잠재의식 속을 헤집고 들어간다. 그리고 영화 제목에서 표현되듯 감독이 던지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에너미, 즉 가장 강력한 적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점을 단순히 자아 분열 현상으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존하는 또 다른 나를 등장시키고 이를 거미라는 존재로 상징화하면서 더욱 무의식적인 공포로 와 닿게끔 한다. 
사실 우리는 이 복잡하고도 심오해 보이는 영화의 줄기를 실생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세상에 두 명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이라고 불리는 두 가지 세계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는 인터넷에 접속하기 위해 온라인상에 또 다른 나(아바타/아이디)를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바로 영화 속에서 실체적인 또다른 나로 표현된 것이라고 해석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영화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는 부분이지만 원작 소설인 ‘도플갱어’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사람들의 내제하여 있는 잠재의식 때문에 이러한 온라인 세상이 오프라인 세상과 점점 더 분리될 것이며 이것이 심화될 경우에 영화에서처럼 나 자신이 마치 나와 전혀 다른 또 다른 나 자신을 만들어내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말하고있다.
그을린 사랑과 프리즈너스를 통해 이미 전 세계 영화광들에게 믿고 보는 보증수표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드니 빌뇌브 감독은 에너미를 통해 복잡한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을 굉장히 심플한 방식으로 표현해냈다. 거미들이 아무렇게나 뱉는 것 같지만 정밀하게 설계되는 거미줄처럼, 패턴의 반복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혼돈은 해석되지 않는 질서와도 같다. 역사, 철학, 사랑 그리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이라는 두 가지 세계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나 자신의 &#8216;존재&#8217;조차 그렇다. 존재론적인 위기, 다른 존재로 나타난 나 자신과의 대면. 그리고 그 만남의 무게를 오롯이 체험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에너미는 지루한 플롯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나를 쫓는 스릴러 같은, 그야말로 드니 빌뇌브다운 영화다.

Enemy, 2014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분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분신술처럼 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분신들을 일하게 하고 나는 일 년 내내 놀고먹는 상상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분신의 존재를 내가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조금 복잡해지지 않을까. 생김새와 목소리 심지어는 몸의 흉터까지 똑같은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면 말이다. 게다가 그 사람이 내가 인생을 살면서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포기한 것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성취해 낸, 마치 내 마음속 한 켠에 고이고이 묻어둔 욕망과 이상적인 꿈을 똘똘 뭉쳐 만든 것만 같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런 사람을 어느 날 내가 직접 마주하게 된다고 가정하면, 과연 나는 그 충격을 스스로 통제하고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에너미는 이런 질문들을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고 관객의 잠재의식 속을 헤집고 들어간다. 그리고 영화 제목에서 표현되듯 감독이 던지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에너미, 즉 가장 강력한 적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점을 단순히 자아 분열 현상으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존하는 또 다른 나를 등장시키고 이를 거미라는 존재로 상징화하면서 더욱 무의식적인 공포로 와 닿게끔 한다. 

사실 우리는 이 복잡하고도 심오해 보이는 영화의 줄기를 실생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세상에 두 명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이라고 불리는 두 가지 세계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는 인터넷에 접속하기 위해 온라인상에 또 다른 나(아바타/아이디)를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바로 영화 속에서 실체적인 또다른 나로 표현된 것이라고 해석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영화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는 부분이지만 원작 소설인 ‘도플갱어’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사람들의 내제하여 있는 잠재의식 때문에 이러한 온라인 세상이 오프라인 세상과 점점 더 분리될 것이며 이것이 심화될 경우에 영화에서처럼 나 자신이 마치 나와 전혀 다른 또 다른 나 자신을 만들어내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말하고있다.

그을린 사랑과 프리즈너스를 통해 이미 전 세계 영화광들에게 믿고 보는 보증수표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드니 빌뇌브 감독은 에너미를 통해 복잡한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을 굉장히 심플한 방식으로 표현해냈다. 거미들이 아무렇게나 뱉는 것 같지만 정밀하게 설계되는 거미줄처럼, 패턴의 반복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혼돈은 해석되지 않는 질서와도 같다. 역사, 철학, 사랑 그리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이라는 두 가지 세계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나 자신의 ‘존재’조차 그렇다. 존재론적인 위기, 다른 존재로 나타난 나 자신과의 대면. 그리고 그 만남의 무게를 오롯이 체험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에너미는 지루한 플롯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나를 쫓는 스릴러 같은, 그야말로 드니 빌뇌브다운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