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binet of Curio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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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십대라는 것은 개새끼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침 나는 딱 중간에 걸친 이십대이고 그러니까 만만한 개새끼중 하나이다. 욕먹는 것은 당연히 억울하다. 그래서 변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봤다. 하지만 너무 어렵다."

- 김사과

Moonage Daydream
by David Bowie
from Ziggy Stardust

(via crow-boy)

Begin Again, 2014
음악 영화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원스를 만든 존 카니 감독이 새로운 음악 영화를 들고 나왔다. 원스의 열렬한 팬으로서 원스의 성공 이후 거대 자본을 가진 헐리우드 스튜디오들과의 타협 끝에 나온 결과물이라 기대 반 걱정 반이었는데 결과는 딱 반반이었다. 우려했던 부분은 우려했던 대로, 기대했던 부분은 기대했던 대로.
사실 원스와 비긴 어게인은 버스킹 음악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빼고 나면 정말로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아일랜드와 미국만큼의 차이고, 데미안 라이스와 마룬5만큼의 차이이기도 하다. 음악적으로 날것 그대로의 소리를 표현한 원스와는 달리 비긴 어게인은 스토리상 거리에서 녹음을 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 관객들이 듣는 음악은 모두 ‘거리의 소음이 정교하게 마스터링된’ 음악이고, 기타와 피아노 같은 단촐한 구성을 가진 원스의 밴드들과는 달리 그레타의 밴드는 가난하다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무려 현악기 세션을 대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등장하는 음악 프로듀서 댄의 존재 자체가 글렌 한사드, 마르게타 이글로바 커플과 그레타의 밴드는 출발점부터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음악 영화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표현인데 원스에서는 이것을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과거의 상처들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고 작곡이나 작사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해내고 있는 반면, 비긴 어게인은 “그레타는 원래 작사 작곡에 숨겨진 천재였어” 라는 것으로 쉽게 넘어가고 있다. 그녀가 왜 음악을 시작했는지, 왜 그렇게 진정성에 목을 매는지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애초에 그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고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 자체에만 집중한다는 가장 큰 증거이다. 물론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에 다가갈수록 영화는 지루할 수밖에 없지만 그만큼 깊이를 더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음악 영화를 표방하며 등장했던 수많은 영화들이 창작 과정에 주목하여 스토리를 끌어나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그래서 대부분 흥행에 실패하지만) 비긴 어게인은 음악을 주제로 한 영화라기 보다는 ‘주인공들이 음악을 하는 드라마 장르’에 가깝다. 근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르… 끔찍하게도 ‘한국 드라마적’이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레타와 댄이 그려지는 방식도 굉장히 이중적이다. 개인적으로 자기 얘기 할 때는 남부럽지 않은 수다쟁이였다가도 남들 얘기만 나오면 꿀 먹은 벙어리마냥 돌변하는 유형의 사람을 싫어하는데, 이 영화 속의 그들이 그렇다. 댄은 자기 음악에 관해 이야기 할 때는 진정성 어쩌고 하면서 누군가의 노력이 담긴 데모 시디를 한 소절도 안 듣고 길바닥에 던져버리고, 그레타는 물론 주인공이니까 성공한 전남친한태 차인 매우 불쌍하지만 재능있는 여자로 나오지만 극중에서 데이브가 하는 음악과 그레타의 음악이 뭐가 그렇게 다른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현악기의 유무와 남녀 보이스의 차이 정도랄까. 게다가 직업상 어쩔 수 없겠지만 가수인 애덤 리바인이 배우인 키이라 나이틀리보다 백 배정도 잘하는 거 같이 들리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한때 우후죽순으로 생긴 귀여운 외모에 기타 치면서 이쁘게 노래하는 홍대 여자 가수들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아이돌 전남친을 평가 절하하는 거랑 다를 바가 없다. 개인적으로 예술로서 음악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신의 삶과 생각들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있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업적인 성공에 눈이 멀어서 음악의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식의 접근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긴 어게인은 좋은 상업 영화다. 지루하고 뻔한 스토리를 넘나드는 플롯으로 해결해냈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깨알 같은 유머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사운드트랙까지. 아마 존 카니 감독이 바라는 것도 딱 이만큼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국식 문화에 익숙한’ 대중들의 코드를 정확히 짚어내는 데에 성공했고 (애덤 리바인을 캐스팅한 것부터)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국내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평론가들이 왜 낮은 별점을 주었는지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레타는 남친을 잃었지만 자기 음반을 얻었고 존 카니 감독은 매니아층을 포기한 대신 대중적인 흥행을 얻게 되었다. 물론 아카데미 상을 또 받기는 힘들겠지만.

Begin Again, 2014

음악 영화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원스를 만든 존 카니 감독이 새로운 음악 영화를 들고 나왔다. 원스의 열렬한 팬으로서 원스의 성공 이후 거대 자본을 가진 헐리우드 스튜디오들과의 타협 끝에 나온 결과물이라 기대 반 걱정 반이었는데 결과는 딱 반반이었다. 우려했던 부분은 우려했던 대로, 기대했던 부분은 기대했던 대로.

사실 원스와 비긴 어게인은 버스킹 음악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빼고 나면 정말로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아일랜드와 미국만큼의 차이고, 데미안 라이스와 마룬5만큼의 차이이기도 하다. 음악적으로 날것 그대로의 소리를 표현한 원스와는 달리 비긴 어게인은 스토리상 거리에서 녹음을 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 관객들이 듣는 음악은 모두 ‘거리의 소음이 정교하게 마스터링된’ 음악이고, 기타와 피아노 같은 단촐한 구성을 가진 원스의 밴드들과는 달리 그레타의 밴드는 가난하다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무려 현악기 세션을 대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등장하는 음악 프로듀서 댄의 존재 자체가 글렌 한사드, 마르게타 이글로바 커플과 그레타의 밴드는 출발점부터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음악 영화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표현인데 원스에서는 이것을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과거의 상처들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고 작곡이나 작사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해내고 있는 반면, 비긴 어게인은 “그레타는 원래 작사 작곡에 숨겨진 천재였어” 라는 것으로 쉽게 넘어가고 있다. 그녀가 왜 음악을 시작했는지, 왜 그렇게 진정성에 목을 매는지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애초에 그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고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 자체에만 집중한다는 가장 큰 증거이다. 물론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에 다가갈수록 영화는 지루할 수밖에 없지만 그만큼 깊이를 더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음악 영화를 표방하며 등장했던 수많은 영화들이 창작 과정에 주목하여 스토리를 끌어나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그래서 대부분 흥행에 실패하지만) 비긴 어게인은 음악을 주제로 한 영화라기 보다는 ‘주인공들이 음악을 하는 드라마 장르’에 가깝다. 근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르… 끔찍하게도 ‘한국 드라마적’이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레타와 댄이 그려지는 방식도 굉장히 이중적이다. 개인적으로 자기 얘기 할 때는 남부럽지 않은 수다쟁이였다가도 남들 얘기만 나오면 꿀 먹은 벙어리마냥 돌변하는 유형의 사람을 싫어하는데, 이 영화 속의 그들이 그렇다. 댄은 자기 음악에 관해 이야기 할 때는 진정성 어쩌고 하면서 누군가의 노력이 담긴 데모 시디를 한 소절도 안 듣고 길바닥에 던져버리고, 그레타는 물론 주인공이니까 성공한 전남친한태 차인 매우 불쌍하지만 재능있는 여자로 나오지만 극중에서 데이브가 하는 음악과 그레타의 음악이 뭐가 그렇게 다른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현악기의 유무와 남녀 보이스의 차이 정도랄까. 게다가 직업상 어쩔 수 없겠지만 가수인 애덤 리바인이 배우인 키이라 나이틀리보다 백 배정도 잘하는 거 같이 들리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한때 우후죽순으로 생긴 귀여운 외모에 기타 치면서 이쁘게 노래하는 홍대 여자 가수들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아이돌 전남친을 평가 절하하는 거랑 다를 바가 없다. 개인적으로 예술로서 음악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신의 삶과 생각들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있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업적인 성공에 눈이 멀어서 음악의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식의 접근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긴 어게인은 좋은 상업 영화다. 지루하고 뻔한 스토리를 넘나드는 플롯으로 해결해냈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깨알 같은 유머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사운드트랙까지. 아마 존 카니 감독이 바라는 것도 딱 이만큼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국식 문화에 익숙한’ 대중들의 코드를 정확히 짚어내는 데에 성공했고 (애덤 리바인을 캐스팅한 것부터)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국내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평론가들이 왜 낮은 별점을 주었는지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레타는 남친을 잃었지만 자기 음반을 얻었고 존 카니 감독은 매니아층을 포기한 대신 대중적인 흥행을 얻게 되었다. 물론 아카데미 상을 또 받기는 힘들겠지만.

140821

1. 유민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뭐라도 해서 작은 힘이나마 보태드리고 싶은데 이미 미디어가 한번 심어놓은 유가족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들 때문에 도저히 방도가 없다. 이번 주일엔 쉬니까 광화문에 들르고 안나가던 성당이라도 가서 기도라도 해야겠다. 아무리 머리를 써봐도 내가 할 수 있는게 고작 이딴거밖에 없네. 씨발1

2. 그 와중에 아이스버켓이니뭐니 하는 꼬라지들이 참 고깝다. 외국에서 좋은 뜻으로 하는 건 알겠는데 우리나라에서 이걸 시작한 놈들은 당최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건지 아님 정말 뭐가 문제인가에 대한 관심이 없는건지. 아마 후자에 가깝겠지. 씨발2

3. 보이는 걸 믿으면 편하다. 그러나 편할때면, 진짜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편하면 불편해. 기술, 언론, 정치도. 심지어 연애같은 사사로운 것들조차. 이 나라에는 언제쯤 그렇지 않은 날이 올까. 씨발3

4. 아 밖에서 운동을 못하니까 더 비관적이 된다. 비는 왜 자꾸 내리는거야. 씨발4

You Don’t Know Jack, 2010
죽고 싶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음을 선택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생명에 대한 가치를 위반하는 행위일까?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태어날 선택지를 주지 않으셨듯이 우리는 죽음을 선택할 어떠한 권리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만약 최후의 순간 환자가 죽음을 바란다면 의사는 마지막까지 환자의 고통을 묵인하고서라도 오로지 환자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걸까? 혹여나 환자가 스스로 죽음을 원한다고해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그 심리상태를 우리는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이러한 물음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된다. “안락사를 행하는 의사를 살인자라고 할 수 있는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물음에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 도덕적인 물음에 ‘예’라는 판결을 내린 사건이 있었다. 1998년 미국에서 130여명의 환자들에게 안락사를 시술한 잭 캐보키언이라는 병리학자가 환자에게 직접 독극물을 주입하여 사망하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를 시술하여 법원에서 2급 살인죄로 25년 형을 선고 받은 것이다. <유 돈 노 잭>은 바로 이 사건을 바탕으로 관객들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미국 법원은 잭이 의사로서 행한 행위에 대한 도덕적인 가치 판단은 철저히 배제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절대 가치 아래엔 그 누구도 헌법 위에 존재할 수 없다.’는 냉정한 판결을 내린다. 영화 막바지에 극적으로 공개되는 이 판결문을 통해 영화의 주제는 ‘안락사’를 뛰어넘어 민주주의 헌법이라는 태두리안에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얼마만큼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이른바 ‘미국식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느끼게 해준다. 이것이 옳고 그른지의 여부를 떠나, 대한민국 또한 전적으로 미국식 민주주의를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유하길 원한다. 지금의 사회는,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미국식 민주주의’는 모두에게 소유하는 법만을 가르치고, 강요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실이란 ‘죄’와 같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대처하는 법을 스스로 경험하여 채득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삶이란 상실의 연속을 견디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어쩌면 잊혀진다는 것, 무언가를 잃어간다는 것은 인간이 체험할 수있는 가장 큰 두려움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경험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상실감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큰 처방은 그것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인간관계, 돈, 그리고 죽음조차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물론 모든 판단은 개인의 몫이다.

You Don’t Know Jack, 2010

죽고 싶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음을 선택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생명에 대한 가치를 위반하는 행위일까?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태어날 선택지를 주지 않으셨듯이 우리는 죽음을 선택할 어떠한 권리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만약 최후의 순간 환자가 죽음을 바란다면 의사는 마지막까지 환자의 고통을 묵인하고서라도 오로지 환자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걸까? 혹여나 환자가 스스로 죽음을 원한다고해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그 심리상태를 우리는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이러한 물음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된다. “안락사를 행하는 의사를 살인자라고 할 수 있는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물음에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 도덕적인 물음에 ‘예’라는 판결을 내린 사건이 있었다. 1998년 미국에서 130여명의 환자들에게 안락사를 시술한 잭 캐보키언이라는 병리학자가 환자에게 직접 독극물을 주입하여 사망하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를 시술하여 법원에서 2급 살인죄로 25년 형을 선고 받은 것이다. <유 돈 노 잭>은 바로 이 사건을 바탕으로 관객들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미국 법원은 잭이 의사로서 행한 행위에 대한 도덕적인 가치 판단은 철저히 배제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절대 가치 아래엔 그 누구도 헌법 위에 존재할 수 없다.’는 냉정한 판결을 내린다. 영화 막바지에 극적으로 공개되는 이 판결문을 통해 영화의 주제는 ‘안락사’를 뛰어넘어 민주주의 헌법이라는 태두리안에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얼마만큼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이른바 ‘미국식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느끼게 해준다. 이것이 옳고 그른지의 여부를 떠나, 대한민국 또한 전적으로 미국식 민주주의를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유하길 원한다. 지금의 사회는,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미국식 민주주의’는 모두에게 소유하는 법만을 가르치고, 강요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실이란 ‘죄’와 같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대처하는 법을 스스로 경험하여 채득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삶이란 상실의 연속을 견디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어쩌면 잊혀진다는 것, 무언가를 잃어간다는 것은 인간이 체험할 수있는 가장 큰 두려움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경험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상실감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큰 처방은 그것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인간관계, 돈, 그리고 죽음조차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물론 모든 판단은 개인의 몫이다.

Diane Birch - Speak a Little Louder (Acoustic Session)

@Odense, Denmark

2012. 8
photo by inoran

140806

결과에 상관없이 오랫동안 준비했던 어떤 일이 끝났다거나, 인생의 고비 같은 것을 넘겼다는 느낌이 들고 났을 때, 사람의 머릿속에는 일종의 보상심리 같은 게 생기는 것 같다. ’힘들었으니까 좀 쉬어야지’라는 마음이랄까. 문제는 그렇게 풀려버린 마음은 다잡기가 쉽지 않아서 너무 오랫동안 방치된다는 데 있다. 귀국 후 한두달을 그렇게 보냈고 그 이후엔 아르바이트에 치여서 ‘적응’을 핑계로 흥청망청 보냈다. 그리고 오늘.

작심삼일이 일상다반사라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나의 게으름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은 아직도 힘들기만 하다. 이런 참회의 감정들은 이번엔 또 얼마나 갈까. 3일? 일주일? 좀 길면 한 달 정도 가려나?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 이유 없이 자꾸 기분이 상하고 뭘 해도 마음이 텅 빈 것 같고 쉼 없이 투덜거리고 불쑥불쑥 화를 내다가 또다시 그런 감정마저도 서서히 사라지고 말겠지. 결국에는 그 어떤 감정에도 무뎌지는 것. 더는 화를 내거나 눈물 흘리는 방법 조차도 잊고 이 세상 모든 일에 무관심해지는 것. 그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 내 평생 영원할 것만 같은 고질병 귀차니즘은 그렇게 나를 잠식한다. 

나 자신에게 했던 수많은 약속들은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것들이었음을 알면서도, 막상 다시 대면하고자 했을때 남는 것은 그저 긴 한숨소리만. 휴우~ 한 달 뒤면 학교로 돌아가야하니 이제는 정말로 여유 시간이 별로 없다. 휴학생의 ‘재미있는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인건가. 이제는 인생을 살아갈 시간.

Paolo Nutini - Iron Sky [Abbey Road Live Session]

인간관계 취향, 140729

그 사람의 취향을 알게 되는 순간. 나는 그 순간이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믿는다. 친밀감 형성에는 서로의 소통 방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화의 주제가 어떤 것이 되고 어떻게 흘러가느냐가 그 사람과 얼마만큼 친해질 수 있느냐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끌리고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취향’이 맞지 않으면 이상하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싫은건 전혀 아닌데. 반대로 성격 나쁘기로 소문난 사람이라도 취향이 맞으면 몇시간이고 마주 앉아 이야기 할 수 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잘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면 그 사람의 취향을 상상해보는 버릇이 있다. 뭐 그동안 내가 마주한 수많은 사람들의 취향을 몇가지 단순한 방식으로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서만 놓고 보면) 그중에 몇가지 견디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를태면 축구보다 야구를 좋아한다던가 콜드플레이보다 마룬5를 좋아한다던가 아니면 알렝드 보통보다 기욤 뮈소를 좋아한다던가 같은 것. 근데 차차리 아예 모르는 경우, 예컨데 스포츠에 관심이 없다거나 폴 메카트니가 누군지 모른다거나 책보다 웹툰 보는 걸 즐긴다거나 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된다. 하지만 앞서 말한데로 어떤 분야에 배경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취향이 극단으로 갈리는 경우에는 묘한 기분이 들면서 대게 열이면 아홉은 관계가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현상이 언제부터 지속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사회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니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패턴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뭐 사실 그런건 딱히 알고 싶지도 않고. 확실한 건 되돌아보니 내 주변엔 그런 사람들만 남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자연스례 멀어졌다는 점.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것이 그 사람의 좋고 싫음의 기준이 아닌 ‘대화의 지속성’과 내가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취향(넓은 범위에서 보면 정치 사상이나 삶의 가치관도 포함되는 것 같다.)의 같고 다름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내 평생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몇명이나 만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결국 주변에 몇명이나 남아 있을런지도 단언할 수 없겠지. 그렇지만 인간관계라는 것이 꼭 넓고 많아야 좋은 건 아니지 않나싶다. 뭐 가끔 커피 한잔 술 한잔 할 수 있는 몇명만 있다면,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만으로도 삶은 행복할 것 같다. 

#Ordinary July

2014. 7
photo by inoran

140723

1. 고등학교 때 Tracy Chapman의 I’m yours, if you are mine 이라는 가사를 참 좋아했다. 치기 어린 마음에 ‘내가 네가 될 수 없고 네가 내가 될 수 없음에서 오는 그 괴리감’이 어딘지 모르게 멋져 보였달까. 그런데 사실 내가 그때 싸이월드 대문 글로 오랫동안 저 문구를 걸어놓고 허영심을 충족시켰던 것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이불 킥이 절로 나온다. 애매한 청춘의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지금의 나는 ‘내가 너였더라면…’로 시작하는 말들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내가 너네 집만큼만 살았어도, 너만큼만 어렸어도, 혹은 너 같이만 생겼어도 같은 말들. 아무리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절대 넘을 수 없는 ‘개인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나서부터, 나는 남의 아픔을 함부로 가늠하고 또 나의 고통을 아무렇게나 발설하는 일을 극도로 꺼리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2. 하여간 ‘나의 아픔’이라는 것은 그렇게나 이해받기 힘든 일이다. 한강 작가의 시집을 읽다가 문득 내 아픔들도 서랍 속에 처박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처박아버리고 남의 일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면 원근법 때문이라도 조금은 고통이 작아 보이지 않을까. 쉽게 변형되고 훼손되는 일상의 자잘한 기억들처럼 나의 아픈 기억들도 착각으로라도 포장되지는 않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단순히 “그건 아픈 기억이었어”라고 딱 잘라 말하고 끝내버릴 순 없는 걸까. 만약 각자의 아픔들이 그렇게 서랍 속에 넣어질 수만 있다면, 한강 작가가 써내려간 시어들처럼 단어의 형태로, 아니 꼭 문자가 아니더라도 어떤 형식으로든 아픔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삶을 가볍게 살아갈 수 있을탠데.

3. 그나마 이렇게 애매하게라도 글로 써놓으면, 버거운 일들도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리기 때문에 아주 조금은 가벼워졌구나 싶어서. 견딜 만 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하 그만 생각하고 자야지.

파란 돌, 한강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을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러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Dan Croll - From Nowhere

9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 무한도전은 더이상 기차와 달리기 시합을 하거나 목욕탕에서 기계 펌프와 물빼기 시합 같은 것들을 할 수 없는 거대 프로그램이 되었버렸다. 머리 살짝 벗겨지신 그 심판 아저씨의 우렁찬 휘슬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었던게 언제 였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드 레이서’ 프로젝트는 어쩌면 그들의 높아진 위상과 인기 만큼의 ‘무모한 도전’이었다. 모두가 안된다고 할 때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것. 번듯한 결과보다 땀흘려 노력한 과정들이 박수 받을 수 있는 것. 유치하고 재미없다는 비난 속에서도 이들을 응원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건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비록 예능 프로그램에 불과할지라도 그들의 진심이 여전히 옳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 어딘지 모르게 뭉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