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binet of Curio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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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ing Home
by 김윤아
from 315360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는 햇살에 마음을 맡기고
나는 너의 일을 떠올리며 수많은 생각에 슬퍼진다

우리는 단지 내일의 일도 지금은 알 수가 없으니까
그저 너의 등을 감싸 안으며 다 잘될 거라고 말할 수밖에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것만 같아 초조해져
무거운 너의 어깨와 기나긴 하루하루가 안타까워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너에게 생기면 좋겠어 너에겐 자격이 있으니까
이제 짐을 벗고 행복해지길 나는 간절하게 소원해 본다

이 세상은 너와 나에게도 잔인하고 두려운 곳이니까
언제라도 여기로 돌아와 집이 있잖아 내가 있잖아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우리를 기다려 주기를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기를
가장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 이뤄지기를 난 기도해 본다 

부디.

영원 속에
by 윤상
from 그땐 몰랐던 일들

영원한 건 없다고 입버릇처럼 넌 말했었지
멀어지는 기억을 잡아두려 애쓰지 말라고
내가 사는 이곳엔 너의 흔적이 너무 많아서
미안해 아직도 난 너를 보내지 못했어
아직도 난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영원 속에 있어
그때도 이만큼 난 너를 생각했을까
손 내밀면 닿는 곳에 함께 있었는데 이제서 뭘 후회하는지
아니 너의 탓은 아니야 그건 너의 탓이 아냐 

성시장의 음악도시 마지막 날. 그동안 매일 두시간 함께해줘서 고마웠다는 사연들. 유희열, 이소라가 그랬던 것처럼 덤덤하게 오늘이 끝이 아닐거라고 말하는, 그가 내뱉는 두서없고 서툴기만한 안녕의 단어들. 그리고 흘러나온 이 노래.

@Reykjavik, Iceland

2012. 8
photo by inoran

140412

1. 이소라의 새 앨범이 나왔다. 기깔나게 좋다. 내가 좋아하는 정순용과 임헌일이 참여한 그녀의 7,8집은 내 음악적 취향을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한국 앨범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소개팅이나 모임에서 어떤 음악을 좋아하냐는 흔하디 흔한 질문에 디어 클라우드나 시규어 로스를 말했다간 이상한 덕후 취급을 받기 쉽상이다. 뭐든지 천편일률적이고 유행 따르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상 그들이 알만한 범주에서 말해야 소통이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음악이 뭐냐고 물어볼때마다 나는 항상 이소라의 음악들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2. 근데 사실 이소라는 대중적인 인지도 만큼 인기가 많은 뮤지션은 아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새 앨범이 나온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매번 앨범이 나올때마다 언론이나 동료 뮤지션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지만,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이색적인 홍보를 했던 이번에도 음원 공개 후 차트 TOP10은 커녕 40위 중반 쯤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무려 69위까지 떨어졌다.) 이선희나 이승환, 임창정 같은 뮤지션들이 꾸준히 10위권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건 뭔가 불공평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3. 이와중에 수많은 아이돌 가수들이 그녀의 곡을 커버해서 부르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악보를 공개했던 것도 이유겠지만, 그녀보다 멜론 차트에서 순위가 높은 곡의 주인공들이 그녀의 곡을 커버링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솔직히 그들 중 몇명은 ‘난 별’이 박효신 노래인줄 알고 커버했을 거라는 의심이 든다. 이런 의심을 가질 정도로 커버곡을 올린 뮤지션들의 면면이 이소라의 음악과는 멀어도 하아아아안참 먼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소라의 명성에 기대어 개개인을 홍보 하는 것으로 밖에는 안보인다. 

4. 실시간 멜론 차트 100위권 내에서 그나마 락 음악을 하는 팀을 고르라면 고작 두 팀밖에 없다. 69위의 이소라와 78위의 넬. 락이 아닌 장르라도 직접 연주나 작곡을 하는 팀이 10명이 채 안된다. 악동뮤지션이 1위를 하고 아이돌이 절반 이상 차트를 점유하고 있는데도 매년 락 페스티벌이 성황을 이루는 기형적인 음악 시장을 가진 나라는 전세계에 우리나라 밖에 없다. 

5.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실질적으로 나타나는 지표와 실제 대중들의 취향이 너무나도 다르다. 이건 음원 시장에만 국한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이 그렇다. 팀 버튼의 스케치 쪼가리를 줄서서 보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 7번방의 선물이 천만 관객을 동원하고, 월드컵 때마다 전례가 없는 응원 인파를 보이는 나라에 프로 축구 리그는 관중 5000명을 넘기기도 힘들다. (지난 대선에서의 일은 차마 이야기하기도 싫다.) 도대체 왜 이런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6. 허핑턴 포스트를 만드는 김도훈 기자가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다. “트위터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걸 사람들이 좋아하는게 아니고, 트위터에서 사람들이 싫어하는걸 사람들이 싫어하는게 아니다.” 

7. 아무튼 나는 폴매카트니를 포기하고 이소라 콘서트에 가기로 했다.

Capital Cities - Farrah Fawcett Hair (ft. André 3000)

운 듯
by 이소라
from 8

운듯 많이 부은 눈 고인 눈물 그득
우는 듯 나인 듯
한숨 자는 꿈꾸듯 꼬옥 감은 눈뜰 듯
자는 듯 아닌 듯 넌

너는 내 온 맘을 가져가 처음부터 잊혀지네
거룩해 울게 해 날 울게
모든 숨 다 멈추면 불태우고 묻혀지네
거룩해 날 울게 해

외면일기, Michel Tournier

image

보통의 일기란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의 글을 담는 것이라고 여겨지고 혹여나 또 털릴까 전전긍긍하는 개인정보처럼 사생활이 담겨있는 1급 기밀 문서와도 같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일기장을 몰래 들추어 본다는 것은 굉장히 부도덕한 행위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곳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남들에게 몰래 들추어 보여지기 위해 노력하고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내면의 이야기보다는 외부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공유하는데에 열중하게 되었다.

미셸 투르니에는 외면 일기(Journal Extime)를 통해 마치 SNS를 하듯 외부의 것들에 대한 본인의 단상들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것은 남들에게 보여지기 위함이 아닌 오롯이 스스로를 위한 행위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를 가진다. 이게 그저 나만보기와 전체공개, 즉 자물쇠와 지구본 사이의 차이에 불과해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글이 가지는 속성을 생각해 볼때 그것이 ‘일기’냐 ‘수필’이냐를 구분짓는 가장 큰 기준이 된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가 ‘나만보기’로 설정해 둔 글들을 읽었으니 죄책감이 들어 사과라도 해야할거 같았는데, 그보다는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가 자신의 비밀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려준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 할아버지랑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SNS로의 소통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가장 큰 무언가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남들을 위한 똑같은 메아리보다는 친구의 육성을, 나에게만 들려주는 소소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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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James Park, London

2012. 8
photo by inoran

Fever
by The Black Keys
from Fever

FACEBOOK, 140330

오늘, 페이스북을 탈퇴했다. 
다른 이들처럼 남들 행복한 모습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기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저 다른 사람의 좋아요가 내 뉴스피드를 과도하게 침범하는 것이 거슬렸다. 그냥 방치할 수도 있었지만, 놔두면 습관적으로 접속하게 되는 탓에 개인정보 보호를 핑계로 과감히 삭제 버튼을 눌렀다. 제대 후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면서 얻고자 했던 것은 내 주변인들이 좋아요를 누른 게시물이 아니라 연락이 닿지 않던 이들과의 간접적인 소통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페이스북은 ‘현실의 나’를 앞세워 친구를 맺게 된다는 점에서 굉장히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다. 예전에는 그러한 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과거 미니홈피와 같은 소통의 장으로 기능했다면, 지금은 오히려 넘쳐나는 정보들 사이에서 그 현실과의 접점이 불편해지는 부분이 되어버렸달까. 관심 없는 광고들이나 싫어하는 것들까지 볼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상황에서, 트위터처럼 아무렇게나 언팔로우를 하기엔 그 현실과의 접점이 문제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이것은 페이스북이라는 회사가 성장하면서 생기는 필연적인 부작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이 개인만이 아닌 기업이나 단체들 그리고 심지어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계정을 허락하면서부터, 페이스북은 마치 온갖 정보들을 공유하는 포털사이트처럼 되었다. 구글, 애플과의 끊임없는 인수경쟁이나 얼마 전 ‘페이스북 페이지’라는 앱을 론칭한 것으로 보아 주커버그횽은 장기적으로 구글과 같은 종합 선물 세트가 되길 원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미니홈피가 망한 이유가 페이스북에 모바일 시장을 내준 것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싸이월드 역시 ‘개인의 영역’에서 그치지 않고 네이트라는 포털사이트의 일부로 기능하면서부터 이용자들에게 외면받았다고 느꼈기에 최근 페이스북의 행보는 아쉽기만 하다. 

그렇다면 나처럼 페이스북을 떠난 사람들이 또 다른 개인의 영역을 찾아 새로운 플랫폼을 형성할까? 아마도 더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 같다. 스마트폰이 충분히 대중화된 시대에서 소통의 역할은 카톡이나 아이메세지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각자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은 잘 꾸며진 모델하우스가 되었고 좋아요는 일종의 네이버 검색어 순위와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어차피 당신과 내가 카톡을 주고받지 않는 사이라면, 페이스북에서 서로의 시시콜콜한 개인사를 아는 것이 더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 페이스북을 탈퇴했다.

Toni Takitani, 2005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다. 이동진 씨가 이 영화를 추천하지 않았더라면 하루키의 작품 중에 토니 타키타니라는 작품이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솔직히 나는 그의 유명한 몇몇 작품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물론 이건 작품을 접했을 때의 나의 개인적인 심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루키의 수필들을 좋아한다. 그의 글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를 좋아한다. 외로움, 공허함 그리고 허무함 같은 것들. 토니 타키타니 역시 그런 명백한 하루키식 소설의 전형과도 같았다.
소설이 영화화된 작품들을 보면 이야기나 설정은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원작의 고유한 ‘정서’들이 훼손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소설 원작자가 영화 연출을 맡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이고 어쩔 수 없이 영화를 만드는 감독 입장에서 원작은 재해석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원작의 독자들은 영화화된 작품을 접하고 나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글이라는 것을 읽고 각자가 상상하는 이미지가 저마다 다르듯이, 독자들의 상상과 실제로 감독이 스크린 속에 표현한 이미지 사이의 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루키의 작품들처럼 이야기 자체보다 ‘정서’에 기대고 있으면서 ‘모호성’까지 가지고 있는 글들은 여러 각도로 해석될 여지가 많아 이러한 간극이 더더욱 크다. 그동안 영화화되었던 하루키의 유명한 소설들이 모두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 것도 그런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소설을 영화로 옮긴다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이고 특히나 원작을 먼저 읽은 관객을 만족시키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다. 아마도 영화나 음악이 주는 시청각적 만족만큼이나 글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상상의 영역’이 다른 예술 분야에서 표현하기 힘든 부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건 어느 쪽의 우열을 떠나 장르마다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치카와 준 감독은 이 부분을 매우 의식한 듯이 본인의 해석을 배재한 채 철저하게 하루키가 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나레이션을 기본으로 한 극 전개, 누가 봐도 하루키의 글 임을 짐작게 하는 대사들. 특히 영화에서 중요한 시퀀스들이 넘어갈 때마다 매번 주인공들은 그대로 있고 카메라만 좌에서 우로 이동하면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마치 책 페이지를 넘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장면 장면들이 주로 인물이나 특정 물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배경은 주로 각 단락의 시작 부분에 이미지로 형상화되서 표현될 뿐, 실제 이야기의 전개 장면에서는 배경이 아웃포커싱 되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는 등 전체적으로 영화라기 보다는 한글자 한글자를 시각화한 영상으로서의 소설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이런식으로 최대한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에 충실했기에 하루키 특유의 ‘정서’가 사라지지 않고 영화 속에 잘 담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싶다.

Toni Takitani, 2005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다. 이동진 씨가 이 영화를 추천하지 않았더라면 하루키의 작품 중에 토니 타키타니라는 작품이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솔직히 나는 그의 유명한 몇몇 작품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물론 이건 작품을 접했을 때의 나의 개인적인 심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루키의 수필들을 좋아한다. 그의 글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를 좋아한다. 외로움, 공허함 그리고 허무함 같은 것들. 토니 타키타니 역시 그런 명백한 하루키식 소설의 전형과도 같았다.

소설이 영화화된 작품들을 보면 이야기나 설정은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원작의 고유한 ‘정서’들이 훼손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소설 원작자가 영화 연출을 맡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이고 어쩔 수 없이 영화를 만드는 감독 입장에서 원작은 재해석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원작의 독자들은 영화화된 작품을 접하고 나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글이라는 것을 읽고 각자가 상상하는 이미지가 저마다 다르듯이, 독자들의 상상과 실제로 감독이 스크린 속에 표현한 이미지 사이의 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루키의 작품들처럼 이야기 자체보다 ‘정서’에 기대고 있으면서 ‘모호성’까지 가지고 있는 글들은 여러 각도로 해석될 여지가 많아 이러한 간극이 더더욱 크다. 그동안 영화화되었던 하루키의 유명한 소설들이 모두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 것도 그런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소설을 영화로 옮긴다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이고 특히나 원작을 먼저 읽은 관객을 만족시키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다. 아마도 영화나 음악이 주는 시청각적 만족만큼이나 글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상상의 영역’이 다른 예술 분야에서 표현하기 힘든 부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건 어느 쪽의 우열을 떠나 장르마다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치카와 준 감독은 이 부분을 매우 의식한 듯이 본인의 해석을 배재한 채 철저하게 하루키가 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나레이션을 기본으로 한 극 전개, 누가 봐도 하루키의 글 임을 짐작게 하는 대사들. 특히 영화에서 중요한 시퀀스들이 넘어갈 때마다 매번 주인공들은 그대로 있고 카메라만 좌에서 우로 이동하면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마치 책 페이지를 넘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장면 장면들이 주로 인물이나 특정 물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배경은 주로 각 단락의 시작 부분에 이미지로 형상화되서 표현될 뿐, 실제 이야기의 전개 장면에서는 배경이 아웃포커싱 되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는 등 전체적으로 영화라기 보다는 한글자 한글자를 시각화한 영상으로서의 소설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이런식으로 최대한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에 충실했기에 하루키 특유의 ‘정서’가 사라지지 않고 영화 속에 잘 담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싶다.

내가 살다살다 고인을 복원한 CG를 보고 반할 줄은 몰랐다.
존.예.

자기 반성, 140322

누구나 한번쯤 믿었던 누군가가 내 얘기를 아무렇지 않은듯 늘어놓으며 가십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경험이 있기 마련이다. 사석에서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사람들일수록 확률이 매우 높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내가 아닌 이상 가십거리에 불과한 시시콜콜한 사연’들로 주변인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이나 연인에게도 그랬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십대 초반의 나는 항상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쓰고 다녔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문제가 생겼다. 내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 만큼 나는 말을 할때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도 해야했다. 다른 사람이 멋대로 나를 이야기 하는게 싫었던 내가, 어느순간 그들을 안주삼아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내가 욕하던 부류의 사람들이 하는 짓을 내가 똑같이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비판에 직면할 때마다 남들에게는 항상 엄격하고 시니컬했지만 나 자신에겐 끝없는 예외를 적용했다. 하- 이게 무슨 허지웅 같은 소린가 싶지만, 돌이켜보면 모두 맞는 말이다. 내 얘기를 맘대로 지껄이던 그 녀석처럼, 나도 어느 누군가의 이야기를 맘대로 떠들고 다니는 그런 찌질한 위선자였다. 

이런 자기 반성의 시간을 거치고 나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이 되었다. 내 얘기를 하자니 이 사람을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남 얘기를 하자니 양심에 찔리고. 씨발 도대체 뭐 어쩌라는 거지? 결국 문제의 근원은 내가 사람을 믿지 못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내가 그랬었듯이, 나 자신도 헷갈려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억지로 통제할 수도 없고 정의할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아마 이건 평생에 걸쳐도 풀지 못할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 아닐까.

어쨌든 수수께기가 풀리지 않는 이상 이제부턴 딱 아는 것만큼 안다고 얘기하기로 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상처 주기보다는, 나에 대해서도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도 딱 아는 것 만큼만. 그 만큼만 이야기하고 그 만큼만 위로받기로. 어 그러고보니 이거 어디서 많이 들은 대사 같은데ㅋㅋㅋ 이번 주말엔 홍상수 영화나 한편 봐야겠다.

Foster The People - Coming of Age

Photograph
by Arcade Fire
from Her

(via sdiary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