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binet of Curio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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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가 독서시라구요? ‘슬로 리딩’을 아십니까?

뉴질랜드 수도 웰링턴의 한 북클럽 회원들은 일주일에 한번 카페에서 만난다. 각자 마실 것을 주문하고 휴대폰은 전부 끈 다음 편안한 의자에 몸을 맡긴 채 한시간동안 조용히 책을 읽는다. 모임의 취지는 작품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잠시라도 전자기기에서 벗어나 방해없이 책을 읽자는 것이다. 모임 이름은 ‘슬로 리딩 클럽(Slow Reading Club),’ 옛 독서방식을 그리워하는 책 애호가들의 슬로 리딩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슬로 리딩 옹호자들은 구글과 스마트폰, 소셜미디어의 등장으로 인간의 시간과 집중력이 흩어지기 이전 독서 방식인 정독 혹은 숙독(focused reading)으로 회귀하길 원한다. 더이상 한자리에서 책 한권을 다 읽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슬로 리딩 컨셉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슬로 리딩 클럽을 시작한 예술제 마케팅 매니저 멕 윌리엄스(31)도 “예전처럼 책읽기에 심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너무 서글펐다”고 말한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화면은 좌에서 우로 일직선이던 글읽기 패턴을 중요한 정보만을 찾아 이리저리 훑어보고 건너뛰는 패턴으로 바꿔놓았다. 웹페이지를 보는 232명 피실험자의 안구 움직임을 관찰한 2006년 연구에 따르면, 처음 한줄은 다 보지만 그 다음 몇 줄은 절반 정도 밖에 읽지 않고 결국 페이지 왼쪽에서 맨밑까지 수직으로 죽 쓸어내리는 ‘F’자형 패턴으로 바뀌었다. 이런 독서습관은 심층적 독해 능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각종 링크들이 방해요소로 작용하는 텍스트를 읽으면 활자로만 된 일반 텍스트를 읽었을 때보다 이해력이 저하된다. 문자와 소리, 움직이는 이미지를 혼합한 멀티미디어 화면도 마찬가지다. 슬로 리딩은 방해요소 없이 조용한 환경에서 중간에 끊지 않고 일직선으로 읽는 패턴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옹호자들은 휴대폰, 컴퓨터를 멀리한 채 편안한 의자에 앉아 읽는 시간을 30~45분 이상 가지라고 조언한다. 간간이 메모를 하는 것도 텍스트에 보다 깊이 빠져드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이쯤되면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능력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나도 요즘 정말 독해력의 저하를 절실히 느낀다. 영어 시험 준비를 하면서 글을 속독으로 읽고 평소에도 스마트폰으로 트위터나 인터넷 기사들을 보면서 나도모르게 모든 글을 주제문 위주로 읽게 되고 세부 내용은 대충 흝어버리는 습관이 생겨났다.

예를 들자면 내 침대 옆에는 읽다만 책들이 여러권 쌓여만가고 있는데, 과거에는 분명 한권에 집중해서 읽는게 편했던 것이 요즘엔 이상하게 끈덕지게 무언가를 읽는다는게 어색하고 불편해진 느낌이다. 그때그때의 기분과 흥미에 따라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경지에 다다름. 그 결과 당연히 각각의 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해졌고 다 읽고 나면 처음 내용이 잘 기억이 안나는 일도 잦아 졌다.

개인적인 독서의 슬럼프라고 생각해서 의식적으로 이런 현상을 극복해보려고 해봤지만 그 결과는 여태껏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안구건조증 증상들로 되돌아오기만 했을 뿐. 이게 반복되다보니 뭔가 텀블러에 글도 안써지고 공부할때 집중력도 계속 흐려지는 것 같고… 어쨌든 이런 현상이 나에게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니 조금은 위안이 되네. 당장 이번 주부터 폰은 집에 두고 책만 들고 카페에 가는 연습을 해봐야겠다.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 2014
모라토리움(Moratorium)이란 라틴어로 지체하다는 의미인 ‘morari’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시정지, 한마디로 ‘배째라’는 상태를 말한다. 지적, 육체적으로는 완전한 성인이 되었음에도 경제적으로는 독립하지 못한 수많은 젊은 이들(학술적으로는 성인이 되기를 잠정유보한 상태?! 라고 함)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모라토리움 신드롬이라는 심리학 용어도 있다. 우리나라보다 10년은 먼저 청년 실업 문제가 시작 된 일본에서 처음 생겨난 이 현상은 어느 곳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모든 일에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을 가르키기도 한다. 영화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는 이러한 ‘삶의 일시정지 모드’에 진입한 모라토리움을 겪는 23세 대졸 취준생의 처절한 잉여+방관+민폐 성장 스토리이다.
이러한 류의 성장 영화가 늘 그렇듯 영화는 주인공 다마코를 불쌍하기는 커녕 한심할 정도로 그려낸다. 마치 현대 사회가 요즘 청년 세대들을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는지를 비꼬기라도 하듯 그렇게 다마코는 일관되게 민폐를 끼치고 잉여력을 발산한다. 특이한 점은 영어 공부를 하거나 자소서를 쓰는 장면이 한 번이라도 나올 법도 한데 그냥 밥 먹는 장면만 주구장창 나온다. 뭐 취업준비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 그건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면 옆에서 자기가 하겠다고 거들 법도 한데 오히려 뭐 좀 해보려고 하면 방해한다며 화를 낸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표현은 이럴때 쓰는 말이구나 싶을 정도로 참 뻔뻔한 청춘이다. 
그럼에도 대학 졸업반인 나는 다마코에게 왠지모를 동질감을 느끼게 되면서 쟤가 왜 저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에 대해 변호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시간을 오롯이 견뎌내는 그녀가 대견스러웠고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는 그녀의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 어떻게 할꺼냐고 닦달하는 것보다는 자녀의 삶을 존중해주고 남들이 뛰라고 할때 조금 쉬어도 된다고 해주는 부모가(어쩌면 일본의 문화가) 참 부럽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끊임없이 남들 눈치보며 컨베이어 벨트 위를 달려야하는 시대를 살면서 이렇게 Pause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것이 요즘 우리 세대에겐 더 큰 용기가 아닐까.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고독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쓸쓸함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슬픔은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 거기에 ‘젊음’이 더해지면 모든 것이 위태로워진다. 츠지 히토나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밝은 색을 잃어버린 화가가 그린 그림 같다고 할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삶의 팔레트에는 분명 무채의 색들, Pause 버튼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니 세상의 모든 다마코들이여 조급해 말기를. 어쨌거나 삶은 흐르고, 언젠가는 그녀와 우리들의 권태도 영화와 함께 끝이 날 것임으로.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 2014

모라토리움(Moratorium)이란 라틴어로 지체하다는 의미인 ‘morari’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시정지, 한마디로 ‘배째라’는 상태를 말한다. 지적, 육체적으로는 완전한 성인이 되었음에도 경제적으로는 독립하지 못한 수많은 젊은 이들(학술적으로는 성인이 되기를 잠정유보한 상태?! 라고 함)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모라토리움 신드롬이라는 심리학 용어도 있다. 우리나라보다 10년은 먼저 청년 실업 문제가 시작 된 일본에서 처음 생겨난 이 현상은 어느 곳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모든 일에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을 가르키기도 한다. 영화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는 이러한 ‘삶의 일시정지 모드’에 진입한 모라토리움을 겪는 23세 대졸 취준생의 처절한 잉여+방관+민폐 성장 스토리이다.

이러한 류의 성장 영화가 늘 그렇듯 영화는 주인공 다마코를 불쌍하기는 커녕 한심할 정도로 그려낸다. 마치 현대 사회가 요즘 청년 세대들을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는지를 비꼬기라도 하듯 그렇게 다마코는 일관되게 민폐를 끼치고 잉여력을 발산한다. 특이한 점은 영어 공부를 하거나 자소서를 쓰는 장면이 한 번이라도 나올 법도 한데 그냥 밥 먹는 장면만 주구장창 나온다. 뭐 취업준비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 그건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면 옆에서 자기가 하겠다고 거들 법도 한데 오히려 뭐 좀 해보려고 하면 방해한다며 화를 낸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표현은 이럴때 쓰는 말이구나 싶을 정도로 참 뻔뻔한 청춘이다.

그럼에도 대학 졸업반인 나는 다마코에게 왠지모를 동질감을 느끼게 되면서 쟤가 왜 저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에 대해 변호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시간을 오롯이 견뎌내는 그녀가 대견스러웠고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는 그녀의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 어떻게 할꺼냐고 닦달하는 것보다는 자녀의 삶을 존중해주고 남들이 뛰라고 할때 조금 쉬어도 된다고 해주는 부모가(어쩌면 일본의 문화가) 참 부럽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끊임없이 남들 눈치보며 컨베이어 벨트 위를 달려야하는 시대를 살면서 이렇게 Pause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것이 요즘 우리 세대에겐 더 큰 용기가 아닐까.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고독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쓸쓸함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슬픔은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 거기에 ‘젊음’이 더해지면 모든 것이 위태로워진다. 츠지 히토나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밝은 색을 잃어버린 화가가 그린 그림 같다고 할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삶의 팔레트에는 분명 무채의 색들, Pause 버튼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니 세상의 모든 다마코들이여 조급해 말기를. 어쨌거나 삶은 흐르고, 언젠가는 그녀와 우리들의 권태도 영화와 함께 끝이 날 것임으로.

Sam Smith - Fast Car (Tracy Chapman cover in the Live Lounge)

#Ordinary April

2014. 8
photo by inoran

The Black Keys - Just Got to Be

"한국에서 이십대라는 것은 개새끼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침 나는 딱 중간에 걸친 이십대이고 그러니까 만만한 개새끼중 하나이다. 욕먹는 것은 당연히 억울하다. 그래서 변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봤다. 하지만 너무 어렵다."

- 김사과

Moonage Daydream
by David Bowie
from Ziggy Stardust

Begin Again, 2014
음악 영화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원스를 만든 존 카니 감독이 새로운 음악 영화를 들고 나왔다. 원스의 열렬한 팬으로서 원스의 성공 이후 거대 자본을 가진 헐리우드 스튜디오들과의 타협 끝에 나온 결과물이라 기대 반 걱정 반이었는데 결과는 딱 반반이었다. 우려했던 부분은 우려했던 대로, 기대했던 부분은 기대했던 대로.
사실 원스와 비긴 어게인은 버스킹 음악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빼고 나면 정말로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아일랜드와 미국만큼의 차이고, 데미안 라이스와 마룬5만큼의 차이이기도 하다. 음악적으로 날것 그대로의 소리를 표현한 원스와는 달리 비긴 어게인은 스토리상 거리에서 녹음을 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 관객들이 듣는 음악은 모두 ‘거리의 소음이 정교하게 마스터링된’ 음악이고, 기타와 피아노 같은 단촐한 구성을 가진 원스의 밴드들과는 달리 그레타의 밴드는 가난하다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무려 현악기 세션을 대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등장하는 음악 프로듀서 댄의 존재 자체가 글렌 한사드, 마르게타 이글로바 커플과 그레타의 밴드는 출발점부터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음악 영화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표현인데 원스에서는 이것을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과거의 상처들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고 작곡이나 작사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해내고 있는 반면, 비긴 어게인은 “그레타는 원래 작사 작곡에 숨겨진 천재였어” 라는 것으로 쉽게 넘어가고 있다. 그녀가 왜 음악을 시작했는지, 왜 그렇게 진정성에 목을 매는지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애초에 그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고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 자체에만 집중한다는 가장 큰 증거이다. 물론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에 다가갈수록 영화는 지루할 수밖에 없지만 그만큼 깊이를 더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음악 영화를 표방하며 등장했던 수많은 영화들이 창작 과정에 주목하여 스토리를 끌어나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그래서 대부분 흥행에 실패하지만) 비긴 어게인은 음악을 주제로 한 영화라기 보다는 ‘주인공들이 음악을 하는 드라마 장르’에 가깝다. 근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르… 끔찍하게도 ‘한국 드라마적’이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레타와 댄이 그려지는 방식도 굉장히 이중적이다. 개인적으로 자기 얘기 할 때는 남부럽지 않은 수다쟁이였다가도 남들 얘기만 나오면 꿀 먹은 벙어리마냥 돌변하는 유형의 사람을 싫어하는데, 이 영화 속의 그들이 그렇다. 댄은 자기 음악에 관해 이야기 할 때는 진정성 어쩌고 하면서 누군가의 노력이 담긴 데모 시디를 한 소절도 안 듣고 길바닥에 던져버리고, 그레타는 물론 주인공이니까 성공한 전남친한태 차인 매우 불쌍하지만 재능있는 여자로 나오지만 극중에서 데이브가 하는 음악과 그레타의 음악이 뭐가 그렇게 다른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현악기의 유무와 남녀 보이스의 차이 정도랄까. 게다가 직업상 어쩔 수 없겠지만 가수인 애덤 리바인이 배우인 키이라 나이틀리보다 백 배정도 잘하는 거 같이 들리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한때 우후죽순으로 생긴 귀여운 외모에 기타 치면서 이쁘게 노래하는 홍대 여자 가수들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아이돌 전남친을 평가 절하하는 거랑 다를 바가 없다. 개인적으로 예술로서 음악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신의 삶과 생각들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있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업적인 성공에 눈이 멀어서 음악의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식의 접근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긴 어게인은 좋은 상업 영화다. 지루하고 뻔한 스토리를 넘나드는 플롯으로 해결해냈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깨알 같은 유머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사운드트랙까지. 아마 존 카니 감독이 바라는 것도 딱 이만큼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국식 문화에 익숙한’ 대중들의 코드를 정확히 짚어내는 데에 성공했고 (애덤 리바인을 캐스팅한 것부터)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국내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평론가들이 왜 낮은 별점을 주었는지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레타는 남친을 잃었지만 자기 음반을 얻었고 존 카니 감독은 매니아층을 포기한 대신 대중적인 흥행을 얻게 되었다. 물론 아카데미 상을 또 받기는 힘들겠지만.

Begin Again, 2014

음악 영화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원스를 만든 존 카니 감독이 새로운 음악 영화를 들고 나왔다. 원스의 열렬한 팬으로서 원스의 성공 이후 거대 자본을 가진 헐리우드 스튜디오들과의 타협 끝에 나온 결과물이라 기대 반 걱정 반이었는데 결과는 딱 반반이었다. 우려했던 부분은 우려했던 대로, 기대했던 부분은 기대했던 대로.

사실 원스와 비긴 어게인은 버스킹 음악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빼고 나면 정말로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아일랜드와 미국만큼의 차이고, 데미안 라이스와 마룬5만큼의 차이이기도 하다. 음악적으로 날것 그대로의 소리를 표현한 원스와는 달리 비긴 어게인은 스토리상 거리에서 녹음을 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 관객들이 듣는 음악은 모두 ‘거리의 소음이 정교하게 마스터링된’ 음악이고, 기타와 피아노 같은 단촐한 구성을 가진 원스의 밴드들과는 달리 그레타의 밴드는 가난하다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무려 현악기 세션을 대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등장하는 음악 프로듀서 댄의 존재 자체가 글렌 한사드, 마르게타 이글로바 커플과 그레타의 밴드는 출발점부터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음악 영화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표현인데 원스에서는 이것을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과거의 상처들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고 작곡이나 작사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해내고 있는 반면, 비긴 어게인은 “그레타는 원래 작사 작곡에 숨겨진 천재였어” 라는 것으로 쉽게 넘어가고 있다. 그녀가 왜 음악을 시작했는지, 왜 그렇게 진정성에 목을 매는지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애초에 그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고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 자체에만 집중한다는 가장 큰 증거이다. 물론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에 다가갈수록 영화는 지루할 수밖에 없지만 그만큼 깊이를 더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음악 영화를 표방하며 등장했던 수많은 영화들이 창작 과정에 주목하여 스토리를 끌어나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그래서 대부분 흥행에 실패하지만) 비긴 어게인은 음악을 주제로 한 영화라기 보다는 ‘주인공들이 음악을 하는 드라마 장르’에 가깝다. 근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르… 끔찍하게도 ‘한국 드라마적’이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레타와 댄이 그려지는 방식도 굉장히 이중적이다. 개인적으로 자기 얘기 할 때는 남부럽지 않은 수다쟁이였다가도 남들 얘기만 나오면 꿀 먹은 벙어리마냥 돌변하는 유형의 사람을 싫어하는데, 이 영화 속의 그들이 그렇다. 댄은 자기 음악에 관해 이야기 할 때는 진정성 어쩌고 하면서 누군가의 노력이 담긴 데모 시디를 한 소절도 안 듣고 길바닥에 던져버리고, 그레타는 물론 주인공이니까 성공한 전남친한태 차인 매우 불쌍하지만 재능있는 여자로 나오지만 극중에서 데이브가 하는 음악과 그레타의 음악이 뭐가 그렇게 다른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현악기의 유무와 남녀 보이스의 차이 정도랄까. 게다가 직업상 어쩔 수 없겠지만 가수인 애덤 리바인이 배우인 키이라 나이틀리보다 백 배정도 잘하는 거 같이 들리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한때 우후죽순으로 생긴 귀여운 외모에 기타 치면서 이쁘게 노래하는 홍대 여자 가수들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아이돌 전남친을 평가 절하하는 거랑 다를 바가 없다. 개인적으로 예술로서 음악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신의 삶과 생각들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있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업적인 성공에 눈이 멀어서 음악의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식의 접근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긴 어게인은 좋은 상업 영화다. 지루하고 뻔한 스토리를 넘나드는 플롯으로 해결해냈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깨알 같은 유머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사운드트랙까지. 아마 존 카니 감독이 바라는 것도 딱 이만큼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국식 문화에 익숙한’ 대중들의 코드를 정확히 짚어내는 데에 성공했고 (애덤 리바인을 캐스팅한 것부터)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국내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평론가들이 왜 낮은 별점을 주었는지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레타는 남친을 잃었지만 자기 음반을 얻었고 존 카니 감독은 매니아층을 포기한 대신 대중적인 흥행을 얻게 되었다. 물론 아카데미 상을 또 받기는 힘들겠지만.

140821

1. 유민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뭐라도 해서 작은 힘이나마 보태드리고 싶은데 이미 미디어가 한번 심어놓은 유가족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들 때문에 도저히 방도가 없다. 이번 주일엔 쉬니까 광화문에 들르고 안나가던 성당이라도 가서 기도라도 해야겠다. 아무리 머리를 써봐도 내가 할 수 있는게 고작 이딴거밖에 없네. 씨발1

2. 그 와중에 아이스버켓이니뭐니 하는 꼬라지들이 참 고깝다. 외국에서 좋은 뜻으로 하는 건 알겠는데 우리나라에서 이걸 시작한 놈들은 당최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건지 아님 정말 뭐가 문제인가에 대한 관심이 없는건지. 아마 후자에 가깝겠지. 씨발2

3. 보이는 걸 믿으면 편하다. 그러나 편할때면, 진짜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편하면 불편해. 기술, 언론, 정치도. 심지어 연애같은 사사로운 것들조차. 이 나라에는 언제쯤 그렇지 않은 날이 올까. 씨발3

4. 아 밖에서 운동을 못하니까 더 비관적이 된다. 비는 왜 자꾸 내리는거야. 씨발4

You Don’t Know Jack, 2010
죽고 싶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음을 선택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생명에 대한 가치를 위반하는 행위일까?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태어날 선택지를 주지 않으셨듯이 우리는 죽음을 선택할 어떠한 권리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만약 최후의 순간 환자가 죽음을 바란다면 의사는 마지막까지 환자의 고통을 묵인하고서라도 오로지 환자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걸까? 혹여나 환자가 스스로 죽음을 원한다고해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그 심리상태를 우리는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이러한 물음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된다. “안락사를 행하는 의사를 살인자라고 할 수 있는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물음에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 도덕적인 물음에 ‘예’라는 판결을 내린 사건이 있었다. 1998년 미국에서 130여명의 환자들에게 안락사를 시술한 잭 캐보키언이라는 병리학자가 환자에게 직접 독극물을 주입하여 사망하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를 시술하여 법원에서 2급 살인죄로 25년 형을 선고 받은 것이다. <유 돈 노 잭>은 바로 이 사건을 바탕으로 관객들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미국 법원은 잭이 의사로서 행한 행위에 대한 도덕적인 가치 판단은 철저히 배제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절대 가치 아래엔 그 누구도 헌법 위에 존재할 수 없다.’는 냉정한 판결을 내린다. 영화 막바지에 극적으로 공개되는 이 판결문을 통해 영화의 주제는 ‘안락사’를 뛰어넘어 민주주의 헌법이라는 태두리안에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얼마만큼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이른바 ‘미국식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느끼게 해준다. 이것이 옳고 그른지의 여부를 떠나, 대한민국 또한 전적으로 미국식 민주주의를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유하길 원한다. 지금의 사회는,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미국식 민주주의’는 모두에게 소유하는 법만을 가르치고, 강요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실이란 ‘죄’와 같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대처하는 법을 스스로 경험하여 채득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삶이란 상실의 연속을 견디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어쩌면 잊혀진다는 것, 무언가를 잃어간다는 것은 인간이 체험할 수있는 가장 큰 두려움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경험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상실감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큰 처방은 그것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인간관계, 돈, 그리고 죽음조차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물론 모든 판단은 개인의 몫이다.

You Don’t Know Jack, 2010

죽고 싶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음을 선택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생명에 대한 가치를 위반하는 행위일까?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태어날 선택지를 주지 않으셨듯이 우리는 죽음을 선택할 어떠한 권리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만약 최후의 순간 환자가 죽음을 바란다면 의사는 마지막까지 환자의 고통을 묵인하고서라도 오로지 환자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걸까? 혹여나 환자가 스스로 죽음을 원한다고해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그 심리상태를 우리는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이러한 물음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된다. “안락사를 행하는 의사를 살인자라고 할 수 있는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물음에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 도덕적인 물음에 ‘예’라는 판결을 내린 사건이 있었다. 1998년 미국에서 130여명의 환자들에게 안락사를 시술한 잭 캐보키언이라는 병리학자가 환자에게 직접 독극물을 주입하여 사망하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를 시술하여 법원에서 2급 살인죄로 25년 형을 선고 받은 것이다. <유 돈 노 잭>은 바로 이 사건을 바탕으로 관객들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미국 법원은 잭이 의사로서 행한 행위에 대한 도덕적인 가치 판단은 철저히 배제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절대 가치 아래엔 그 누구도 헌법 위에 존재할 수 없다.’는 냉정한 판결을 내린다. 영화 막바지에 극적으로 공개되는 이 판결문을 통해 영화의 주제는 ‘안락사’를 뛰어넘어 민주주의 헌법이라는 태두리안에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얼마만큼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이른바 ‘미국식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느끼게 해준다. 이것이 옳고 그른지의 여부를 떠나, 대한민국 또한 전적으로 미국식 민주주의를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유하길 원한다. 지금의 사회는,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미국식 민주주의’는 모두에게 소유하는 법만을 가르치고, 강요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실이란 ‘죄’와 같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대처하는 법을 스스로 경험하여 채득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삶이란 상실의 연속을 견디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어쩌면 잊혀진다는 것, 무언가를 잃어간다는 것은 인간이 체험할 수있는 가장 큰 두려움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경험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상실감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큰 처방은 그것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인간관계, 돈, 그리고 죽음조차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물론 모든 판단은 개인의 몫이다.

Diane Birch - Speak a Little Louder (Acoustic Session)

@Odense, Denmark

2012. 8
photo by inoran

140806

결과에 상관없이 오랫동안 준비했던 어떤 일이 끝났다거나, 인생의 고비 같은 것을 넘겼다는 느낌이 들고 났을 때, 사람의 머릿속에는 일종의 보상심리 같은 게 생기는 것 같다. ’힘들었으니까 좀 쉬어야지’라는 마음이랄까. 문제는 그렇게 풀려버린 마음은 다잡기가 쉽지 않아서 너무 오랫동안 방치된다는 데 있다. 귀국 후 한두달을 그렇게 보냈고 그 이후엔 아르바이트에 치여서 ‘적응’을 핑계로 흥청망청 보냈다. 그리고 오늘.

작심삼일이 일상다반사라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나의 게으름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은 아직도 힘들기만 하다. 이런 참회의 감정들은 이번엔 또 얼마나 갈까. 3일? 일주일? 좀 길면 한 달 정도 가려나?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 이유 없이 자꾸 기분이 상하고 뭘 해도 마음이 텅 빈 것 같고 쉼 없이 투덜거리고 불쑥불쑥 화를 내다가 또다시 그런 감정마저도 서서히 사라지고 말겠지. 결국에는 그 어떤 감정에도 무뎌지는 것. 더는 화를 내거나 눈물 흘리는 방법 조차도 잊고 이 세상 모든 일에 무관심해지는 것. 그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 내 평생 영원할 것만 같은 고질병 귀차니즘은 그렇게 나를 잠식한다. 

나 자신에게 했던 수많은 약속들은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것들이었음을 알면서도, 막상 다시 대면하고자 했을때 남는 것은 그저 긴 한숨소리만. 휴우~ 한 달 뒤면 학교로 돌아가야하니 이제는 정말로 여유 시간이 별로 없다. 휴학생의 ‘재미있는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인건가. 이제는 인생을 살아갈 시간.

Paolo Nutini - Iron Sky [Abbey Road Live Session]

인간관계 취향, 140729

그 사람의 취향을 알게 되는 순간. 나는 그 순간이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믿는다. 친밀감 형성에는 서로의 소통 방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화의 주제가 어떤 것이 되고 어떻게 흘러가느냐가 그 사람과 얼마만큼 친해질 수 있느냐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끌리고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취향’이 맞지 않으면 이상하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싫은건 전혀 아닌데. 반대로 성격 나쁘기로 소문난 사람이라도 취향이 맞으면 몇시간이고 마주 앉아 이야기 할 수 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잘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면 그 사람의 취향을 상상해보는 버릇이 있다. 뭐 그동안 내가 마주한 수많은 사람들의 취향을 몇가지 단순한 방식으로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서만 놓고 보면) 그중에 몇가지 견디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를태면 축구보다 야구를 좋아한다던가 콜드플레이보다 마룬5를 좋아한다던가 아니면 알렝드 보통보다 기욤 뮈소를 좋아한다던가 같은 것. 근데 차차리 아예 모르는 경우, 예컨데 스포츠에 관심이 없다거나 폴 메카트니가 누군지 모른다거나 책보다 웹툰 보는 걸 즐긴다거나 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된다. 하지만 앞서 말한데로 어떤 분야에 배경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취향이 극단으로 갈리는 경우에는 묘한 기분이 들면서 대게 열이면 아홉은 관계가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현상이 언제부터 지속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사회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니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패턴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뭐 사실 그런건 딱히 알고 싶지도 않고. 확실한 건 되돌아보니 내 주변엔 그런 사람들만 남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자연스례 멀어졌다는 점.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것이 그 사람의 좋고 싫음의 기준이 아닌 ‘대화의 지속성’과 내가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취향(넓은 범위에서 보면 정치 사상이나 삶의 가치관도 포함되는 것 같다.)의 같고 다름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내 평생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몇명이나 만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결국 주변에 몇명이나 남아 있을런지도 단언할 수 없겠지. 그렇지만 인간관계라는 것이 꼭 넓고 많아야 좋은 건 아니지 않나싶다. 뭐 가끔 커피 한잔 술 한잔 할 수 있는 몇명만 있다면,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만으로도 삶은 행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