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binet of Curiosities
About ▾ Ask me anything ▾Search ▾ArchiveSubscribe MENU ▾
Cymbeline, 2014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다양한 형태로 접할 때마다 항상 느끼는 점은, 네러티브 구조가 뻔하고 정극이라고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환타지에 가깝다는 점이다. 심벨린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작품들보다 더욱 더 신파적이다. 수 많은 등장 인물이 등장하고 저마다 이야기와 목적을 가지고 복잡하게 뒤엉키지만 사실 이 지루한 이야기는 대충 흩어보아도 서사 구조가 뻔히 읽힌다. 사랑과 명예를 좇는 멍청한 인간들의 말로 그리고 결국엔 피로 얼룩질 수 밖에 없는 권력과 부에 대한 인간의 태생적인 욕망들.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셰익스피어가 이러한 막장 드라마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바탕에는 ‘관객에 대한 조롱’의 정서가 깔려있다. 이러한 조롱이 대중들에게 알게 모르게 용인될 수 있었던 것은 셰익스피어를 접하는 관객들이 일단 ‘명작’을 본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명작의 기준 자체가 거의 불변의 진리처럼 굳어져 버린다는 것인데, 이를 태면 여행 책자 속의 강남역은 별4개 경복궁은 별5개 우리동네는? 별없음과 같다고나 할까. 이러한 구별이 반드시 거짓은 아니지만, 안내 책자가 특정한 곳을 찬양한다는 것은 여행자에게 많은 것을 빼앗아 간다. 마치 내가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것 처럼, 내가 시규어 로스의 음악을 듣고 지루에 하는 나의 친구에게 어떻게 이 음악이 지루할 수가 있는거야! 라고 말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가진 명작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도전과도 같다. 
마이클 알메레이다 감독이 심벨린을 현대적 배경으로 다소 허접하게 옮긴 것에도 구시대적 명작에 열광하는 현대의 대중들을 조롱하기 위한 의도가 내포 되어 있다. 그렇기에 영화 심벨린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만듬새와 촬영이 모두 매끄럽고 짱짱한 배우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소용 없을 것이다. (아마 이러한 실패를 부각시키기 위해 일부러 유명한 배우들을 캐스팅한 것만 같다.) 내년 초에 국내에서 개봉한다는데 아마 셰익스피어에 대한 모독이라며 소리 소문 없이 묻혀버리겠지. 영화나 연극 같은 예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지금의 사회는 이러한 불변의 진리들에 대한 반대 의견들이 언제나 묵살 당할 수 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만큼 대중들(특히나 우리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여러 매체들)의 평가에 의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Cymbeline, 2014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다양한 형태로 접할 때마다 항상 느끼는 점은, 네러티브 구조가 뻔하고 정극이라고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환타지에 가깝다는 점이다. 심벨린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작품들보다 더욱 더 신파적이다. 수 많은 등장 인물이 등장하고 저마다 이야기와 목적을 가지고 복잡하게 뒤엉키지만 사실 이 지루한 이야기는 대충 흩어보아도 서사 구조가 뻔히 읽힌다. 사랑과 명예를 좇는 멍청한 인간들의 말로 그리고 결국엔 피로 얼룩질 수 밖에 없는 권력과 부에 대한 인간의 태생적인 욕망들.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셰익스피어가 이러한 막장 드라마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바탕에는 ‘관객에 대한 조롱’의 정서가 깔려있다. 이러한 조롱이 대중들에게 알게 모르게 용인될 수 있었던 것은 셰익스피어를 접하는 관객들이 일단 ‘명작’을 본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명작의 기준 자체가 거의 불변의 진리처럼 굳어져 버린다는 것인데, 이를 태면 여행 책자 속의 강남역은 별4개 경복궁은 별5개 우리동네는? 별없음과 같다고나 할까. 이러한 구별이 반드시 거짓은 아니지만, 안내 책자가 특정한 곳을 찬양한다는 것은 여행자에게 많은 것을 빼앗아 간다. 마치 내가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것 처럼, 내가 시규어 로스의 음악을 듣고 지루에 하는 나의 친구에게 어떻게 이 음악이 지루할 수가 있는거야! 라고 말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가진 명작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도전과도 같다. 

마이클 알메레이다 감독이 심벨린을 현대적 배경으로 다소 허접하게 옮긴 것에도 구시대적 명작에 열광하는 현대의 대중들을 조롱하기 위한 의도가 내포 되어 있다. 그렇기에 영화 심벨린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만듬새와 촬영이 모두 매끄럽고 짱짱한 배우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소용 없을 것이다. (아마 이러한 실패를 부각시키기 위해 일부러 유명한 배우들을 캐스팅한 것만 같다.) 내년 초에 국내에서 개봉한다는데 아마 셰익스피어에 대한 모독이라며 소리 소문 없이 묻혀버리겠지. 영화나 연극 같은 예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지금의 사회는 이러한 불변의 진리들에 대한 반대 의견들이 언제나 묵살 당할 수 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만큼 대중들(특히나 우리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여러 매체들)의 평가에 의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윈터슬립 / 트라이브 / 심벨린
왜 부산 국제 영화제는 점점 퇴보하고 있는 느낌이 드는 걸까.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19th

2014. 10
photo by inoran

Yellow Flicker Beat
by Lorde
from The Hunger Games Mocking Jay Part 1

#Ordinary September

2014. 9
photo by inoran

Hang Me, Oh Hang Me
by Oscar Isaac
from Inside Llewyn Davis (Original Soundtrack Recording)

St. Vincent - Cruel (Live at KCRW’s Apogee Sessions)

취미가 독서시라구요? ‘슬로 리딩’을 아십니까?

뉴질랜드 수도 웰링턴의 한 북클럽 회원들은 일주일에 한번 카페에서 만난다. 각자 마실 것을 주문하고 휴대폰은 전부 끈 다음 편안한 의자에 몸을 맡긴 채 한시간동안 조용히 책을 읽는다. 모임의 취지는 작품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잠시라도 전자기기에서 벗어나 방해없이 책을 읽자는 것이다. 모임 이름은 ‘슬로 리딩 클럽(Slow Reading Club),’ 옛 독서방식을 그리워하는 책 애호가들의 슬로 리딩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슬로 리딩 옹호자들은 구글과 스마트폰, 소셜미디어의 등장으로 인간의 시간과 집중력이 흩어지기 이전 독서 방식인 정독 혹은 숙독(focused reading)으로 회귀하길 원한다. 더이상 한자리에서 책 한권을 다 읽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슬로 리딩 컨셉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슬로 리딩 클럽을 시작한 예술제 마케팅 매니저 멕 윌리엄스(31)도 “예전처럼 책읽기에 심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너무 서글펐다”고 말한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화면은 좌에서 우로 일직선이던 글읽기 패턴을 중요한 정보만을 찾아 이리저리 훑어보고 건너뛰는 패턴으로 바꿔놓았다. 웹페이지를 보는 232명 피실험자의 안구 움직임을 관찰한 2006년 연구에 따르면, 처음 한줄은 다 보지만 그 다음 몇 줄은 절반 정도 밖에 읽지 않고 결국 페이지 왼쪽에서 맨밑까지 수직으로 죽 쓸어내리는 ‘F’자형 패턴으로 바뀌었다. 이런 독서습관은 심층적 독해 능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각종 링크들이 방해요소로 작용하는 텍스트를 읽으면 활자로만 된 일반 텍스트를 읽었을 때보다 이해력이 저하된다. 문자와 소리, 움직이는 이미지를 혼합한 멀티미디어 화면도 마찬가지다. 슬로 리딩은 방해요소 없이 조용한 환경에서 중간에 끊지 않고 일직선으로 읽는 패턴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옹호자들은 휴대폰, 컴퓨터를 멀리한 채 편안한 의자에 앉아 읽는 시간을 30~45분 이상 가지라고 조언한다. 간간이 메모를 하는 것도 텍스트에 보다 깊이 빠져드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이쯤되면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능력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나도 요즘 정말 독해력의 저하를 절실히 느낀다. 영어 시험 준비를 하면서 글을 속독으로 읽고 평소에도 스마트폰으로 트위터나 인터넷 기사들을 보면서 나도모르게 모든 글을 주제문 위주로 읽게 되고 세부 내용은 대충 흝어버리는 습관이 생겨났다.

예를 들자면 내 침대 옆에는 읽다만 책들이 여러권 쌓여만가고 있는데, 과거에는 분명 한권에 집중해서 읽는게 편했던 것이 요즘엔 이상하게 끈덕지게 무언가를 읽는다는게 어색하고 불편해진 느낌이다. 그때그때의 기분과 흥미에 따라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경지에 다다름. 그 결과 당연히 각각의 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해졌고 다 읽고 나면 처음 내용이 잘 기억이 안나는 일도 잦아 졌다.

개인적인 독서의 슬럼프라고 생각해서 의식적으로 이런 현상을 극복해보려고 해봤지만 그 결과는 여태껏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안구건조증 증상들로 되돌아오기만 했을 뿐. 이게 반복되다보니 뭔가 텀블러에 글도 안써지고 공부할때 집중력도 계속 흐려지는 것 같고… 어쨌든 이런 현상이 나에게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니 조금은 위안이 되네. 당장 이번 주부터 폰은 집에 두고 책만 들고 카페에 가는 연습을 해봐야겠다.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 2014
모라토리움(Moratorium)이란 라틴어로 지체하다는 의미인 ‘morari’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시정지, 한마디로 ‘배째라’는 상태를 말한다. 지적, 육체적으로는 완전한 성인이 되었음에도 경제적으로는 독립하지 못한 수많은 젊은 이들(학술적으로는 성인이 되기를 잠정유보한 상태?! 라고 함)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모라토리움 신드롬이라는 심리학 용어도 있다. 우리나라보다 10년은 먼저 청년 실업 문제가 시작 된 일본에서 처음 생겨난 이 현상은 어느 곳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모든 일에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을 가르키기도 한다. 영화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는 이러한 ‘삶의 일시정지 모드’에 진입한 모라토리움을 겪는 23세 대졸 취준생의 처절한 잉여+방관+민폐 성장 스토리이다.
이러한 류의 성장 영화가 늘 그렇듯 영화는 주인공 다마코를 불쌍하기는 커녕 한심할 정도로 그려낸다. 마치 현대 사회가 요즘 청년 세대들을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는지를 비꼬기라도 하듯 그렇게 다마코는 일관되게 민폐를 끼치고 잉여력을 발산한다. 특이한 점은 영어 공부를 하거나 자소서를 쓰는 장면이 한 번이라도 나올 법도 한데 그냥 밥 먹는 장면만 주구장창 나온다. 뭐 취업준비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 그건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면 옆에서 자기가 하겠다고 거들 법도 한데 오히려 뭐 좀 해보려고 하면 방해한다며 화를 낸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표현은 이럴때 쓰는 말이구나 싶을 정도로 참 뻔뻔한 청춘이다. 
그럼에도 대학 졸업반인 나는 다마코에게 왠지모를 동질감을 느끼게 되면서 쟤가 왜 저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에 대해 변호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시간을 오롯이 견뎌내는 그녀가 대견스러웠고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는 그녀의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 어떻게 할꺼냐고 닦달하는 것보다는 자녀의 삶을 존중해주고 남들이 뛰라고 할때 조금 쉬어도 된다고 해주는 부모가(어쩌면 일본의 문화가) 참 부럽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끊임없이 남들 눈치보며 컨베이어 벨트 위를 달려야하는 시대를 살면서 이렇게 Pause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것이 요즘 우리 세대에겐 더 큰 용기가 아닐까.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고독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쓸쓸함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슬픔은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 거기에 ‘젊음’이 더해지면 모든 것이 위태로워진다. 츠지 히토나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밝은 색을 잃어버린 화가가 그린 그림 같다고 할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삶의 팔레트에는 분명 무채의 색들, Pause 버튼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니 세상의 모든 다마코들이여 조급해 말기를. 어쨌거나 삶은 흐르고, 언젠가는 그녀와 우리들의 권태도 영화와 함께 끝이 날 것임으로.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 2014

모라토리움(Moratorium)이란 라틴어로 지체하다는 의미인 ‘morari’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시정지, 한마디로 ‘배째라’는 상태를 말한다. 지적, 육체적으로는 완전한 성인이 되었음에도 경제적으로는 독립하지 못한 수많은 젊은 이들(학술적으로는 성인이 되기를 잠정유보한 상태?! 라고 함)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모라토리움 신드롬이라는 심리학 용어도 있다. 우리나라보다 10년은 먼저 청년 실업 문제가 시작 된 일본에서 처음 생겨난 이 현상은 어느 곳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모든 일에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을 가르키기도 한다. 영화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는 이러한 ‘삶의 일시정지 모드’에 진입한 모라토리움을 겪는 23세 대졸 취준생의 처절한 잉여+방관+민폐 성장 스토리이다.

이러한 류의 성장 영화가 늘 그렇듯 영화는 주인공 다마코를 불쌍하기는 커녕 한심할 정도로 그려낸다. 마치 현대 사회가 요즘 청년 세대들을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는지를 비꼬기라도 하듯 그렇게 다마코는 일관되게 민폐를 끼치고 잉여력을 발산한다. 특이한 점은 영어 공부를 하거나 자소서를 쓰는 장면이 한 번이라도 나올 법도 한데 그냥 밥 먹는 장면만 주구장창 나온다. 뭐 취업준비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 그건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면 옆에서 자기가 하겠다고 거들 법도 한데 오히려 뭐 좀 해보려고 하면 방해한다며 화를 낸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표현은 이럴때 쓰는 말이구나 싶을 정도로 참 뻔뻔한 청춘이다.

그럼에도 대학 졸업반인 나는 다마코에게 왠지모를 동질감을 느끼게 되면서 쟤가 왜 저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에 대해 변호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시간을 오롯이 견뎌내는 그녀가 대견스러웠고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는 그녀의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 어떻게 할꺼냐고 닦달하는 것보다는 자녀의 삶을 존중해주고 남들이 뛰라고 할때 조금 쉬어도 된다고 해주는 부모가(어쩌면 일본의 문화가) 참 부럽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끊임없이 남들 눈치보며 컨베이어 벨트 위를 달려야하는 시대를 살면서 이렇게 Pause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것이 요즘 우리 세대에겐 더 큰 용기가 아닐까.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고독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쓸쓸함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슬픔은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 거기에 ‘젊음’이 더해지면 모든 것이 위태로워진다. 츠지 히토나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밝은 색을 잃어버린 화가가 그린 그림 같다고 할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삶의 팔레트에는 분명 무채의 색들, Pause 버튼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니 세상의 모든 다마코들이여 조급해 말기를. 어쨌거나 삶은 흐르고, 언젠가는 그녀와 우리들의 권태도 영화와 함께 끝이 날 것임으로.

Sam Smith - Fast Car (Tracy Chapman cover in the Live Lounge)

#Ordinary August

2014. 8
photo by inoran

The Black Keys - Just Got to Be

"한국에서 이십대라는 것은 개새끼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침 나는 딱 중간에 걸친 이십대이고 그러니까 만만한 개새끼중 하나이다. 욕먹는 것은 당연히 억울하다. 그래서 변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봤다. 하지만 너무 어렵다."

- 김사과

Moonage Daydream
by David Bowie
from Ziggy Stardust

Begin Again, 2014
음악 영화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원스를 만든 존 카니 감독이 새로운 음악 영화를 들고 나왔다. 원스의 열렬한 팬으로서 원스의 성공 이후 거대 자본을 가진 헐리우드 스튜디오들과의 타협 끝에 나온 결과물이라 기대 반 걱정 반이었는데 결과는 딱 반반이었다. 우려했던 부분은 우려했던 대로, 기대했던 부분은 기대했던 대로.
사실 원스와 비긴 어게인은 버스킹 음악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빼고 나면 정말로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아일랜드와 미국만큼의 차이고, 데미안 라이스와 마룬5만큼의 차이이기도 하다. 음악적으로 날것 그대로의 소리를 표현한 원스와는 달리 비긴 어게인은 스토리상 거리에서 녹음을 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 관객들이 듣는 음악은 모두 ‘거리의 소음이 정교하게 마스터링된’ 음악이고, 기타와 피아노 같은 단촐한 구성을 가진 원스의 밴드들과는 달리 그레타의 밴드는 가난하다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무려 현악기 세션을 대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등장하는 음악 프로듀서 댄의 존재 자체가 글렌 한사드, 마르게타 이글로바 커플과 그레타의 밴드는 출발점부터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음악 영화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표현인데 원스에서는 이것을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과거의 상처들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고 작곡이나 작사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해내고 있는 반면, 비긴 어게인은 “그레타는 원래 작사 작곡에 숨겨진 천재였어” 라는 것으로 쉽게 넘어가고 있다. 그녀가 왜 음악을 시작했는지, 왜 그렇게 진정성에 목을 매는지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애초에 그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고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 자체에만 집중한다는 가장 큰 증거이다. 물론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에 다가갈수록 영화는 지루할 수밖에 없지만 그만큼 깊이를 더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음악 영화를 표방하며 등장했던 수많은 영화들이 창작 과정에 주목하여 스토리를 끌어나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그래서 대부분 흥행에 실패하지만) 비긴 어게인은 음악을 주제로 한 영화라기 보다는 ‘주인공들이 음악을 하는 드라마 장르’에 가깝다. 근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르… 끔찍하게도 ‘한국 드라마적’이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레타와 댄이 그려지는 방식도 굉장히 이중적이다. 개인적으로 자기 얘기 할 때는 남부럽지 않은 수다쟁이였다가도 남들 얘기만 나오면 꿀 먹은 벙어리마냥 돌변하는 유형의 사람을 싫어하는데, 이 영화 속의 그들이 그렇다. 댄은 자기 음악에 관해 이야기 할 때는 진정성 어쩌고 하면서 누군가의 노력이 담긴 데모 시디를 한 소절도 안 듣고 길바닥에 던져버리고, 그레타는 물론 주인공이니까 성공한 전남친한태 차인 매우 불쌍하지만 재능있는 여자로 나오지만 극중에서 데이브가 하는 음악과 그레타의 음악이 뭐가 그렇게 다른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현악기의 유무와 남녀 보이스의 차이 정도랄까. 게다가 직업상 어쩔 수 없겠지만 가수인 애덤 리바인이 배우인 키이라 나이틀리보다 백 배정도 잘하는 거 같이 들리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한때 우후죽순으로 생긴 귀여운 외모에 기타 치면서 이쁘게 노래하는 홍대 여자 가수들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아이돌 전남친을 평가 절하하는 거랑 다를 바가 없다. 개인적으로 예술로서 음악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신의 삶과 생각들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있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업적인 성공에 눈이 멀어서 음악의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식의 접근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긴 어게인은 좋은 상업 영화다. 지루하고 뻔한 스토리를 넘나드는 플롯으로 해결해냈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깨알 같은 유머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사운드트랙까지. 아마 존 카니 감독이 바라는 것도 딱 이만큼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국식 문화에 익숙한’ 대중들의 코드를 정확히 짚어내는 데에 성공했고 (애덤 리바인을 캐스팅한 것부터)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국내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평론가들이 왜 낮은 별점을 주었는지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레타는 남친을 잃었지만 자기 음반을 얻었고 존 카니 감독은 매니아층을 포기한 대신 대중적인 흥행을 얻게 되었다. 물론 아카데미 상을 또 받기는 힘들겠지만.

Begin Again, 2014

음악 영화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원스를 만든 존 카니 감독이 새로운 음악 영화를 들고 나왔다. 원스의 열렬한 팬으로서 원스의 성공 이후 거대 자본을 가진 헐리우드 스튜디오들과의 타협 끝에 나온 결과물이라 기대 반 걱정 반이었는데 결과는 딱 반반이었다. 우려했던 부분은 우려했던 대로, 기대했던 부분은 기대했던 대로.

사실 원스와 비긴 어게인은 버스킹 음악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빼고 나면 정말로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아일랜드와 미국만큼의 차이고, 데미안 라이스와 마룬5만큼의 차이이기도 하다. 음악적으로 날것 그대로의 소리를 표현한 원스와는 달리 비긴 어게인은 스토리상 거리에서 녹음을 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 관객들이 듣는 음악은 모두 ‘거리의 소음이 정교하게 마스터링된’ 음악이고, 기타와 피아노 같은 단촐한 구성을 가진 원스의 밴드들과는 달리 그레타의 밴드는 가난하다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무려 현악기 세션을 대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등장하는 음악 프로듀서 댄의 존재 자체가 글렌 한사드, 마르게타 이글로바 커플과 그레타의 밴드는 출발점부터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음악 영화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표현인데 원스에서는 이것을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과거의 상처들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고 작곡이나 작사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해내고 있는 반면, 비긴 어게인은 “그레타는 원래 작사 작곡에 숨겨진 천재였어” 라는 것으로 쉽게 넘어가고 있다. 그녀가 왜 음악을 시작했는지, 왜 그렇게 진정성에 목을 매는지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애초에 그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고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 자체에만 집중한다는 가장 큰 증거이다. 물론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에 다가갈수록 영화는 지루할 수밖에 없지만 그만큼 깊이를 더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음악 영화를 표방하며 등장했던 수많은 영화들이 창작 과정에 주목하여 스토리를 끌어나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그래서 대부분 흥행에 실패하지만) 비긴 어게인은 음악을 주제로 한 영화라기 보다는 ‘주인공들이 음악을 하는 드라마 장르’에 가깝다. 근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르… 끔찍하게도 ‘한국 드라마적’이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레타와 댄이 그려지는 방식도 굉장히 이중적이다. 개인적으로 자기 얘기 할 때는 남부럽지 않은 수다쟁이였다가도 남들 얘기만 나오면 꿀 먹은 벙어리마냥 돌변하는 유형의 사람을 싫어하는데, 이 영화 속의 그들이 그렇다. 댄은 자기 음악에 관해 이야기 할 때는 진정성 어쩌고 하면서 누군가의 노력이 담긴 데모 시디를 한 소절도 안 듣고 길바닥에 던져버리고, 그레타는 물론 주인공이니까 성공한 전남친한태 차인 매우 불쌍하지만 재능있는 여자로 나오지만 극중에서 데이브가 하는 음악과 그레타의 음악이 뭐가 그렇게 다른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현악기의 유무와 남녀 보이스의 차이 정도랄까. 게다가 직업상 어쩔 수 없겠지만 가수인 애덤 리바인이 배우인 키이라 나이틀리보다 백 배정도 잘하는 거 같이 들리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한때 우후죽순으로 생긴 귀여운 외모에 기타 치면서 이쁘게 노래하는 홍대 여자 가수들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아이돌 전남친을 평가 절하하는 거랑 다를 바가 없다. 개인적으로 예술로서 음악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신의 삶과 생각들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있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업적인 성공에 눈이 멀어서 음악의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식의 접근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긴 어게인은 좋은 상업 영화다. 지루하고 뻔한 스토리를 넘나드는 플롯으로 해결해냈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깨알 같은 유머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사운드트랙까지. 아마 존 카니 감독이 바라는 것도 딱 이만큼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국식 문화에 익숙한’ 대중들의 코드를 정확히 짚어내는 데에 성공했고 (애덤 리바인을 캐스팅한 것부터)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국내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평론가들이 왜 낮은 별점을 주었는지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레타는 남친을 잃었지만 자기 음반을 얻었고 존 카니 감독은 매니아층을 포기한 대신 대중적인 흥행을 얻게 되었다. 물론 아카데미 상을 또 받기는 힘들겠지만.

140821

1. 유민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뭐라도 해서 작은 힘이나마 보태드리고 싶은데 이미 미디어가 한번 심어놓은 유가족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들 때문에 도저히 방도가 없다. 이번 주일엔 쉬니까 광화문에 들르고 안나가던 성당이라도 가서 기도라도 해야겠다. 아무리 머리를 써봐도 내가 할 수 있는게 고작 이딴거밖에 없네. 씨발1

2. 그 와중에 아이스버켓이니뭐니 하는 꼬라지들이 참 고깝다. 외국에서 좋은 뜻으로 하는 건 알겠는데 우리나라에서 이걸 시작한 놈들은 당최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건지 아님 정말 뭐가 문제인가에 대한 관심이 없는건지. 아마 후자에 가깝겠지. 씨발2

3. 보이는 걸 믿으면 편하다. 그러나 편할때면, 진짜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편하면 불편해. 기술, 언론, 정치도. 심지어 연애같은 사사로운 것들조차. 이 나라에는 언제쯤 그렇지 않은 날이 올까. 씨발3

4. 아 밖에서 운동을 못하니까 더 비관적이 된다. 비는 왜 자꾸 내리는거야. 씨발4